본 시는 ‘원수에게 저주를 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본문)에 이르러서는 ‘나를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시가 다윗 자신을 괴롭히는 자를 원수로 규정하고, 그 원수의 파멸을 간구하는 것이라면, 또 다윗 개인의 보호와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라면 성경에 기록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성경에 이 시가 기록된 것은 언약대로 원수는 파멸하게 되어 있고, 그 이유는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문을 읽어보자. 21절에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다.
이 구절이 ‘나를 선대하시며, 나를 건지소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인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가 중요하다.
인간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런 시각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오독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뜻은 왜곡된다. 하나님이 왜 나를 선대해야 하나? 그리고 나를 건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착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남이 아닌 나이기에 무조건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인가? 아무리 답을 찾으려 해도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만물을 지으셨고, 당신의 언약대로 세상을 주관하신다. 본문에 나타난 ‘나(다윗)’는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 뽑힌 인물이고, 그가 가는 길은 장차 메시아가 걸어야 길을 앞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하고 막아서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이며 당연히 진멸의 대상이 되고, ‘나’는 건짐 받아야 하는 것이 합당하다.
22절에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23절의 상황 때문에 조성된 환경이다. 23절을 보자.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가오며”라고 했다. 여기서는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무관하게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석양 그림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깊은 밤으로 접어든다. ‘나의 가는 것이 이와 같다’고 했으니 이것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사막 바람에 의해 휩쓸리는 ‘메뚜기’의 운명 또한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보다 더 큰 세력에 의해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다윗의 가는 길이다.
24절에 “금식함으로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나는 또 저희의 훼방거리라 저희가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라고 했다.
음식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니 육체가 수척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는다. 이것 또한 내 행동을 고치거나 그들에게 아부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겪으신 일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것이 일상사였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이것은 사단이 예수님을 향해 한 말이었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0-42).” 이 말은 길을 가는 자들과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며 한 말이다.
26-27절에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라고 했다.
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임을 대적들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기도해서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다윗이 주님의 뜻대로 될 것임을 믿고 간구하는 것이다(요일5:14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29-30절에 “나의 대적으로 욕을 옷 입듯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무리 중에서 찬송하리니”라고 했다.
시인이 원수를 저주해 달라는 기도가 감사와 찬송으로 종결된다. 원수를 향한 억울함과 분노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찬송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요19:30)”고 외치셨다. 고난의 길을 걷다가 결국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순종의 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범사에 감사, 찬송하는 것 외에 성도가 달리 할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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