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빌립보 지역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1장에서는 ‘내가 비록 옥에 갇혀 있지만 복음은 더 넓게 전파되고 있으니 염려할 이유가 없다’고 했고, 또 자신은 ‘빨리 몸을 떠나(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지만 살아서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도 너희에게 유익하기에 아직은 하나님이 나를 살려두셨다’고 하면서 마치 자신의 생사 문제를 남의 이야기 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2장에서는 더 강경한 어조가 펼쳐진다. 1장에서는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다(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면 되니까)’는 식인데, 2장에서는 ‘너희들도 나와 함께 죽자’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왜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제 본문을 살펴보자. 1~8절을 요약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끼리는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1~2절)’고 하면서, 그 한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5절)’이라고 했다.
이 말씀에 순종하려면, 먼저 성도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고, 다음은 성도라고 판정이 난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마지막으로 뜻을 모아 한 마음(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본문을 따라가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절)”고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지 않고 종의 형체(사람)로 이 땅에 오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는데,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지도 않고, 또 그 자리를 떠나 낮은 자리로 이동할 수도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음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할 수 있지만, 죄인인 우리는 남의 죄를 대신해 죽을 자격도 없고, 남의 죄를 용서할 수도 없다.
3~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 이 구절 역시 전혀 우리 삶과 거리가 먼 내용이다.
사도가 명한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우리의 죄인 됨을 드러내기 위해 하신 말씀이고, 또 예수님만이 이 말씀을 이룰 분이라는 점을 알려서 그만 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그들을 죄에서 정결하게 하셨는데, 그 이루신 결과를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통보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일하신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고,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할 뿐이다.
진짜 주님은 높은 자리에서 지시와 명령만 내리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몸을 드려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를 정결하게 씻으신 분이다. 그러니 이 주님을 나의 주로 영접한 자는 더 이상 자기 몸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주님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자는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몸을 드려야 하고, 주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 일에 활용되는 몸이란 점을 본문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선악적 지식으로 무장한 자들이 생각하는 주님은 높은 하늘에 고고하게 계시면서 아래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인간들의 필요와 결핍을 채워주시는 분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충성, 봉사하는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복을 내리시고, 그 반대의 삶을 사는 자에게는 벌을 주시는 분이다.
만약 이런 분이 주님이라면 굳이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할 이유가 없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인정하신 진짜 주님은 하늘 영광을 비워두시고 낮고 천한 죄인의 자리에 오셨고, 죄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고, 3일 만에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자기 사명을 완수하셨다.
사단은 늘 우리를 유혹한다. 하나님(신)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라는 전제하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능력과 권세로 우리에게 복과 화를 내리시고, 내가 어떻게 행하는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라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이 되신 주님, 인간에게 죽임당하신 주님,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만이 참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