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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이능우
Subject   강남강의 중 자아정립의 세월
강남강의 중
자아정립의 세월

 주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을 했을 때에
주님의 이 고백은 불신앙입니다. 왜 불신앙이냐 하면은 보는데서 나왔기 때문에. 보는데서 나왔기 때문에 불신앙이에요. 그럼 안보고 믿는 것은 뭐냐? 안보고 믿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보고 믿는 것도 불신앙이고 안보고 믿는 것도 불신앙이에요. 망상이죠 망상. 상상한 것을 믿는 것. 이래도 저래도 불신앙인데. 뭐냐? 신앙은 뭐냐 하면 신앙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없고 신앙은 주님께서 신앙이라고 규정을 해주는, 해 줄 때 비로소 신앙이 되는 겁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예수님 = 신앙’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개념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이 신앙이고 예수님 자신이 믿음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믿음이에요. 이것을 성경에 실제로 이걸 적용시킨 대목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여러분 잘 아시는 거니까 그냥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을 예수님으로 바꿔넣으면 되요. 예수님이 바로 실상이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예수님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아벨이 믿음이 있는게 아니고 아벨 속에 예수님 계셨고 노아가 믿음이 있는게 아니고 노아라는 형태로 예수님이 일하신거에요.

아브라함이 믿는게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주님이 들어가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을 증거한거에요. 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까. 바라는 것은 허구거든요. 인간이 바라는 것은 다 허구에요. 인간에게서 나온 허구에요. 실상에 접근하고 실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건 뭐냐? 예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라게 한거에요.


그래서 도마라는 이 존재, 도마의 있음 이거는 파괴됩니다. 파괴되고 도마는 예수님이란 존재에 합류가 돼요. 예수님 안에 있는 신앙에 도마가 이용당하면서 합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신앙을 자기 자신이 실상이다 신앙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믿음 없는 도마를 한껏 이용하신 거에요. 이용하시고 뭐가 남느냐 하면 결국 그 근거만 남아요. 그 과정만 남아요. 어디서부터 어디로 왔느냐를 그 흔적을 딱 만들어내지요.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하게 되면 도마라는 존재, 이 존재와 예수님의 존재가 둘이 됐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그 일을 발생시켜서 존재는 완전히 깨지죠. 분해가 되지요. 존재는 소멸되고 여기에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사건화돼요. 사건화. 사건화되면서 예수님의 존재에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합류하게 되면 이 사건화가 뭐냐? 이 세상에서는 어떤 식이냐? 돌발성. 돌발적으로 일어나요. 돌발적이라는 것은 비연속적이에요 비연속적.

내가 내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면 그건 실패합니다. 우리 이 세상에는 걸칠 수 있는게 없어요. 어떻게 붙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 붙잡으려면 내가 존재가 해체되는게 아니고 내가 존재로 유지해야 자아정립하는 그 평소의 버릇에 그대로 그게 계속 지속되거든요.

주님께서는 도마가 믿는 자로 보지를 않습니다. 믿는 자는 오직 믿는 자라고 할 사람은 예수님뿐이어야 돼요. 다른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서 믿는 자가 된다는 절차가 필요한 존재들 대상자에요.

예수님을 경유해버리면 나는 믿는 자가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하신 자가 되어 버려요. 주께서 믿게 하신 자는 주님이 믿음의 실상이기 때문에 주님이 믿음의 실상인 것을 증거하는 그냥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바로 아벨이고 노아고 에녹이고 그런 사람이에요. 에녹 붙들고 당신 구세주하면 안돼요. 노아 붙들고 구세주하면 안돼요. 마찬가지로 믿을 것은 주님이지 노아가 아니잖아요.

 성도는 지옥가도 괜찮은 것이 성도라는 존재는 이미 십자가와 함께 지옥 갔다 다녀온 사람들이에요. 죄와 저주를 받고 온 사람들이에요. 나의 존재는 저주받고 심판받고 그 다음의 존재는 뭐냐? 그리스도의 존재에 합류한거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이에요. 전에는 어느 안? 아담 안이었어요. 아담 안에 있는 존재는 저주 받고 심판받고 미리 당겨서. 미리 당겨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은 겁니다.

 살 이유가 없는데 살게 하신 것은 주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살렸다는 것을 현재 있게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영생을 얻은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아주 주님한테 된통 얻어터질 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성도는 사는 것 자체가 주의 앞의 고난에 참여한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어떤 널널하고 할 일없고 백수처럼 살더라도 그게 고난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선교사로 가서 고생고생해도 자기 존재에 대해서 어떤 미련을 갖고 있으면 그건 순교 아닙니다. 그거는 고난이 아니고 뭐냐 하면 고생이죠.

 믿는 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에 속한 자는 자기 자력으로 아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계속 칸막이를 지음으로서 그 칸막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믿음, 칸막이 자체에서 주께서 사건화시켰죠. 사건화시키면 사건화시키고 그 다음 사건 올 때까지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믿음 없는 자가 되어버려요 어느새.


왜? 다시 내 중심으로 돌아섭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믿음의 주인공이 네가 아니고 예수님인 것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여기에서 따로 끊어진 것을 이때 우리 믿음 좋아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끊어져야 될 것을 주께서 이런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이어버리는 겁니다.

. 율법이라는 것이 저주도 있고 복도 있다는 두가지 양상을 우리 자신을 가지고 율법의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닌 것을 증명해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에요. 우리는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놀아나는 겁니다. 말씀이.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잘났다가 아니라 “아! 말씀이 그대로 되어지네. 세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네.” 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마치 뜻밖인 것처럼 마치 예전에는 몰랐던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게 하는거에요.

주님과 도마의 만남에서 도마가 창자국 못자국 만지고 믿었잖아요. 도마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거에요. 보고 믿는 거에요.
 이것은 네가 하늘나라에서 인정한 믿음이 아니야를 하시기 위해서 아니야를 충분하게 여기에 사건화시켜서 도마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유발시킨 겁니다.

믿음이 아니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방식은 믿음이 아닌 것을 내용을 할 때 이게 믿음이 되어버려요. 믿음이 아닌 것을 빼버리는게 아니고 믿음이 아닌 것을 이걸 포장을 해버리면 이게 믿음이 돼요. 아닙니다가 믿음이 되는 거에요 이게.

죄를 짓지 않겠다고 버티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죄 짓는 이것이 도넛의 앙꼬 역할을 해요. 만두의 앙꼬 역할을 해요.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 사함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기 때문에.
그동안 죄 안지으려고 하는 그자들이 바로 사실은 악마와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그건 바리새인들이 다 했던 거에요.

지금 이 순간 너는 이미 죽은거야. 그리고 네 안에 있는 것은 주님이 살아 있어서 네가 지금 산다는 것은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그냥 사건의 일부야. 하나의 사태에 불과한거에요.

예수님의 몸이 뭐냐 하면 죄를 받아들여서 죄를 원료로 해가지고 자기의 피를 매개로 해서 하나님의 의를 생산하는 유일한 몸이 예수님의 몸입니다.

 어제 나를 만든 변수들과 오늘의 나를 만든 변수가 달라요.그때그때 달라요 우리는.
그러면 그때그때 다른 나를 우발적인 나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는거에요 제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으면 안돼요. 그럼 일관적인 것은 뭐냐? 일관적인 것은 일관적인 사건에 성질, 본질이 드러나요. 그게 뭐냐? 주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 주님이 주님답게 하는 것은 항상 일관적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일관성.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

기적에서 표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재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게 있다면 주님께서 마지막 표적 다시 말해서 내 창자국 못자국을 도마에게 보여줄 이유가 없어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거에요. 너 때문에.
네가 왜 악마한테 벌벌 떨고 네 인생을 걱정하느냐. 그 죄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 그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이제부터는 너 자체가 네가 날 믿을 생각하지 말고 너 자체가 내 믿음을 증거하는 내 표적으로 이제는 내가 삼으리라. 그래서 성령이 오신거에요.

주는 누구십니까? 묻는 것 자체가 이미 질문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이 접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는 매일같이 주님의 답변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주님의 일의 결과물로 살아가는 거에요 우리가. 주님 때문에 살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8절인가 거기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의 주 되심을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발현되도록 구체화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거에요. 성령께서. 성령께서는 오직 주님밖에 몰라요. 너를 통해서 주님 끄집어낼거야. 그 생각이 성령의 생각이에요.

도마가 무슨 믿음이 있습니까? 보고 믿은게 뭐가 있어요? 하지만 그 이적, 기적을 표적이 되게 하시는 능력이 다시 말해서 존재에서 사건(표적->사인->상징.기호->사건)이 되게 하는 능력이 이제 성령이 임하게 될 겁니다.

  성령 오신다는 것은 이미 뭐냐 하면은 내가 오게 되면 이미 너에게는 죄사함이 있다. 죄사함 받았다. 그렇다면 네가 이렇게 모든 벌어지는 일은 죄 사함을 선포하는 거죠. 우리가 선포하고 나 꼬라지 이렇지만 죄사함 받았어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죄인이다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에서만 죄사함이라는 이미 결과로서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자기를 자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십니까? 성령이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기도를 주께서 하게 하시고 그 응답은 누가 하십니까? 성령으로 응답하시는 거에요 성령으로. 그럼 그 성령의 응답은 뭐냐? 그거 딱 하나 밖에 없어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고마움과 감사가 없는 일은 성령의 일이 아니고 마귀의 일입니다. 곧 나의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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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5.02 -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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