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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서경수
Subject   오용익 목사님 설교
우리교회 주일오전설교 유다서 1장 3절(믿음의 도)20160918-오 용익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서 1장 3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 말씀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이걸 풀면 전체적으로 다 풀릴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옵니다. 그래서 먼저 단번에 얻은 믿음의 도가 뭔지, 먼저 짧게 정리하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단번에 얻은 믿음의 도"안에 있는 내용이 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첫째, 천국 가는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런 뜻이 들어있는 겁니다. 첫째, 둘째하면 첫째를 잊어버리신다면서요? 저도 잊어버리니까 괜찮습니다. 첫째는 천국 가는 믿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믿음 안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완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마태복음 26장에서 기도한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이 철벽을 세우는 기도를 왜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철벽을 세워놓고 자기 혼자 뛰어넘어 가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믿음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완결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가서 다 이루었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자, 첫째, 둘째, 셋째를 다 들으셨습니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첫째, 천국 가는 믿음은 예수님 믿음뿐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믿음 안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셋째 뭡니까? 저도 잊어버렸잖아요. 셋째, 예수님의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완결되었습니다. 괜히 제가 앞에 장황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문제 내겠습니다. 내림 덧셈하는 거예요. 이 세 가지를 전부 내려서 더해보는 겁니다. 더하면 무슨 답이 나올까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여기 성경 본문에 있는 대로, 성도에게 단번에 믿음의 도를 주셨기 때문에 이 믿음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더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말씀으로 성화하세요. 그게 1번입니다. 2번은, 이제 개인이 믿어서 얻는 구원은 없다. 더 짧게 하겠습니다. 개인 떼고 다 떼고, 구원은 없다. 몇 번 이겠습니까? 하도 문제를 많이 풀어가지고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낸 것은 제가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과연 본심도 그럴까요?  정말 본심에서 그럴까요? 애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수능을 치렀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답 맞혔습니다. 대학 쪽에서 그러는 겁니다. 너는 불합격이야. 너는 불합격이다. 지금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이 그거 아닌가요? 개인구원 없잖아요? 너 대학 못 온다는 이야기잖아요? 벌써 표정들이 이상하세요. 제가 이상한 이야기한 거 아니에요.

답 잘 맞혔어요. 근데 너 대학 못 가! 그러면 내가 답을 맞혔으니까 저는 하늘나라에 가는 거 아닙니까? 아마 모든 수능생들이 그렇게 따지고 들 겁니다. 이런 수능생들은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저는 대학 못 가도 상관없습니다. 그 질문의 내용대로 그대로 된다면 그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제가 대학 떨어지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말을 바꿀까요? 제가 지옥가고 천국가고, 그건 이제 저의 관심이 아닙니다. 상관없습니다. 주의 뜻대로 말씀이 그렇게 다 말씀대로 되었다면 그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그렇게 말할 성도가 있을까요? 이게 느낌이 얼른 안 오니까 제가 지금부터 실험을 하겠습니다. 사고의 실험을 하는 겁니다. 진짜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실험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다 제가 물을 채우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편안하게 앉아계시는데, 이제 편안하게 앉아계시지 마세요. 저는 지금부터 바다에게 훈련을 시키는 바다의 조교에요. 여러분들을 물에다 다 빠트릴 거예요. 발이 닿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숨 쉬기 위해서는 발과 손을 계속 저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겨우 숨을 쉬고, 여러분들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시죠? 목을 내놓고 그러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앞에 읊었던 세 가지를 읊어대는 겁니다. 저는 보트 타고 편안하게. 첫째, 예수님은..이게 들어올까요? 들어올까요? 튜브나 던져라. 튜브나. 이게 우리의 본심이 아닐까요? 좀 숨이나 쉬고, 그리고 예수고. 좀 숨이나 쉬고, 그리고 복음이고. 좀 숨이나 쉬고, 그리고 천국이고 뭐 그렇지. 당장 내가 살기 바쁘고, 내가 지금 발이 안 닿아서 겨우겨우 숨을 쉬는데, 이게 들어옵니까? 이게? 머리로는 들어와요. 그러나 몸이 그걸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제가 생각의 실험을 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한 현실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개념 하나를 모셔오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바다>라는 그런 개념입니다. 여러분들, 저랑 다 같이 어디서 들었던 건데, 저는 이렇게 찾아가지고 왔어요. 존재의 바다. 제가 모셔온다는 표현을 쓴 것은, 그 개념이 손상되지 않도록 잘 전달하도록 하겠다는 그런 뜻이 들어있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이 잘못 모셔온 것 같으면 나중에 따져주시기 바랍니다.

존재의 바다를 지금부터 설명할 텐데요, 다른 것 없어요. 우리가 아까 사고의 실험 했던 거, 우리가 막 허우적거렸던 그것을 좀 더 깊이 따져보고자 하는 겁니다. 왜요? 이걸 따지는 것이 왜 중요한데요? 믿음이 가짜라 그래요.  믿음이 가짜라 그런 거예요. 본심이 아니라 그런 거예요. 본심에서 나온 믿음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농후한 거예요. 그래서 따져야 하는 거예요. 존재의 바다를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는 존재에 걸린 개념이고, 하나는 바다에 걸린 개념인데, 나중에 바다까지 설명하면 하나로 합쳐집니다.

자, 존재에 걸린 개념이 뭐냐 하면, 모든 말과 행동, 나한테서 나간 모든 것은 나한테로 다시 돌아온다는 겁니다. 존재로 귀환한다는 거예요. 이게. 그게 존재에 걸린 개념입니다. 나한테서 나간 것, 내가 경험한 것, 내가 아는 것. 내가 복음 압니다. 이게 나한테로 돌아와요. 내가 예수 믿습니다. 그게 희한하게 나한테로 돌아와요. 그러니까 저 천국 가는 것 맞죠? 이게 이상하게 나한테로 돌아와요. 참 이상해요. 저쪽으로 보내지를 못해요.

두 번째는 바다에 걸린 개념입니다. 바다가 뭐냐 하면은, 일상이라는 거예요. 모든 것은 일상으로 복귀한다. 쉽게 말하면, 내가 사는데 급급하다는 그 말입니다. 복음, 예수, 뭐 믿음은 예수님밖에 없다. 뭐 다 좋아요. 근데, 사는데 급급해요. 사는데. 그래서 여기서 믿음이 나오면, 어떤 구조를 가지고 나오게 되어 있어요. 어떤 구조냐 하면, 제가 주보에 약간 써놨는데요, 허풍과 엄살의 구조입니다. 반드시 이 상태에서 뭘 듣게 되어도 반드시 거기로 떨어져요. 허풍과 엄살로.

허풍이 뭐냐 하면, 쪼끔 숨을 쉬고 살만 하면, 내가 이만큼 해서 이만큼 산다. 내가 잘해서 이만큼 산다고, 그런 허풍을 떨어요. 주님이 나를 괜히 사랑하겠나? 내가 이만큼 믿어드리니까. 그런 것들이 밑에 꼬물꼬물 기어 다녀요. 그러다가 쪼끔 힘들어지면 이제 엄살이 나와요. 주님이여,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힘들게 헤엄치는 이게 안 보이십니까? 주님 왜 이렇게.. 쪼끔만 도와주면 내가 주님 더 잘 믿을 텐데. 왜 이러십니까? 내가 주님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엄살이 나오는 거죠. 이런 허풍과 엄살의 구조.

교회에서 기도를 들어보세요. 다 허풍과 엄살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해요. 우리교회 대표기도는 아닙니다. 교회에서 기도 시작 할 때, 허풍으로 시작해요. 주께서 이 불모지 땅에 복음을 보내 주셔가지고, 대구 지묘동에 복음을, 험악한 이 땅에 복음을 보내 주셔가지고, 복음을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 목사를 보내주시고, 그렇게 허풍으로 시작했다가, 허풍이 끝나면 엄살이 시작돼요. 뭐를 해주시고, 또 뭐를 해주시고, 뭐를 도와주시고, 그러니까 이거 없으면 못살겠다 이 말이에요. 이걸 해줘야 되고, 저걸 해줘야 되고.

저는 묻고 싶어요. 이거 믿음인가요? 이 허풍과 엄살의 구조. 사람들은 이야기하면 그거 믿음 아니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믿음 아니다. 그리고 꼭 나오는 소리가 믿음 아닌 믿음을 자기가 안다는 거예요. 믿음 아닌 믿음을. 제가 왜 허풍과 엄살의 구조를 이야기했을까요? 구조가 같으면 같은 거예요. 근데 꼭 하는 말이, 이거는 성령이 주신 거라는 거예요. 성령이 주신 거. 이건 그냥 성령을 받아서 나온 믿음이라는 거예요. 이게.

과연 그런지 제가 존재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어떤 노래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오빠생각>이라는 노래입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산에서 울고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도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이거 허풍이거든요. 이게 허풍이에요. 우리 오빠가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고 했다. 오빠생각과 뭐가 일치하느냐 하면 비단구두가 일치하는 거예요. 제가 여기에다 그대로 집어넣어볼게요. 예수님 생각과 일치하는 게 나의 영생이라면, 이 오빠생각과 비단구두 이것과, 내가 예수 믿는 것과 영생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1번. 차이난다. 2번. 차이 없다. 계산이 이상하게 잘 떨어지네요. 아무 차이가 없죠. 지금.

이래서 애 먹는 거예요. 비단구두 때문에 애 먹는 건가요? 비단구두 달라고 하는 거예요. 자, 이제 제일 중요한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단계로 넘어가야 해요. 이 오빠생각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리아, 마르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개입하시기 전에, 예수를 믿었던 그 믿음이 이게 오빠생각이었어요. 비단구두였어요. 그것이 언제 균열이 일으켰느냐 하면 예수님이 개입했을 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오빠가 병이 들었는데, 오빠가 썩어서 문드러질 때까지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선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불평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요. 잘 들으셔야 돼요. 저한테 하는 소리에요.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이 잘 하셨으면 내 비단구두가 날아가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여기, 또 계셨더면, "여기"라는 것은 공간이에요. 공간. "계셨더면", 이건 시간. 공간과 시간. 자기 몸을 두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 안에 예수님도 거기 같이 계시고, 자기가 서 있는 이 공간 안에 예수님도 같이 계시고, 바로 거기서 올라오는 그런 믿음보다 예수님의 믿음은 자기보다 조금 더 센 믿음이라고 그렇게 알았던 거예요.

다시 말하면 자기 믿음의 범주 안에서 예수님도 일하는 줄 알았던 거예요. 그저 같은 레벨로 봤다는 거예요. 근데 그게, 여러분 지금 제가 예수님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믿음이 왔을 때, 비로서 이 믿음에 균열이 생기는 거예요.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도대체 이 믿음이, 그게 정말 믿음인줄 알고 끝까지 가는 거예요. 끝까지.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나는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 믿음, 이거 말이에요. 지금 가득 유포되어 있는 이 믿음,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이 성령 받아서 나한테 들어왔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 그게 지금 균열이 일어난 거예요.  

여기 지진이 일어났다면서요? 우리 동네에서는 약간. 여기는 세게. 저는 빨리 하고 가야 되겠어요. 그거 어디서 온 지진이에요? 여러분 아세요? 어디서 온 지진인지? 뭘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제가 끝까지 들어봤어요. 학자들이 나와서 뭐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설명을 길게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모른다는 거예요. 그게 답이죠. 모르더라구요. 그냥 파만 있어요. 내가 정리해놓았던 믿음이 두두둑 두두둑 두두둑 다 떨어져요. 그래서 마리아, 마르다는 지금 욥 비슷해요.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이해를 못하겠어. 진앙지를 몰라. 자기 믿음의 안에 있는 어떤 사고, 생각, 이거 가지고는 해석이 안 되는, 해석의 절벽에 부딪힌 거예요. 해석의 절벽.

이게 말씀이 개입하는 그 지점이에요. 그 면이에요. 말씀이 닿는 그 지점이에요. 먹통이 되는 순간 말이에요. 이게 뭐야? 이게 어디서 오는 지진이야? 이게 흔들리기는 흔들리는데 이게 뭐냐고? 내 안에서는 이걸 지금 해석할 수 있는 그 뭐가 없다고요. 그게 뭡니까? 라고 들어있는 그게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볼멘소리인데,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이해할 수 없느냐면, 왜 자라나는 새싹을 밟느냐 이런 식이죠. 왜 꺾느냐고요. 그걸?

하나님으로부터 온 아들이면 믿음을 키워줘야죠. 여러분이 이게 궁금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많이 궁금했는데. 처음에는 이렇게 살짝 안 밟는 느낌이에요. 근데 가면 갈수록 밟는 느낌이에요. 제가 오는데도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제가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왔는데, 막 헤매는 거예요. 이상규 집사님한테 전화해도 안 받아. 안 도와줘. 지금 여기서 저를 도와주는 그 무엇도 없어요. 불편해 죽겠어요. 왜? 저의 일상이 아니니까. 볼펜 하나를 넣으려고 했더니 이게 새 양복이라서, 윗주머니, 이게 꿰매져 있어요. 불편해요. 다 불편해요. 어디서 바람나오는 거예요? 저는 바람도 무서워 죽겠어요.

여러분 제자들이요, 예수님과 함께 바다를 건너가는데, 제자들이 평소에 바다를 그렇게 무서워했던 사람들인가요? 아니죠. 베테랑들이에요. 베테랑어부죠. 웬만한 파도는 그냥...평생 그렇게 했던 사람들이에요. 근데 거기에 누가 탔어요? 예수님이 탔어요. 혼이 나갔어요. 근데 예수님이 혼내요. 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면 뒤에 믿음에 추가할 수 있는, 믿음이 적으니까 믿음을 많게 할 수 있는 무슨 언질을 줘야 되잖아요. 바람과 바다야 잔잔하라 해놓고, 꾸짖고는 그걸로 끝이에요.

뭘 어떻게 하라고? 뭘 어쩌라고?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주던가? 그래요. 알아요. 믿음 없는 거, 인정할 수 있어요. 믿음 없는 거 알아요. 성질내는 거 알아요. 길 꼬이면, 다시는 오나 봐라. 나 믿음 없어요. 믿음 없으니까 좀 키워달라고요. 키워주지는 않고 왜 오히려 훼방을 놓느냐고요. 뭘 어떡하라고? 뒤로 가면 갈수록 있잖아요. 이 분위기가 짙어지는 거예요. 지금 볼멘소리 정도지만, 뒤로 가면 아예 걷잡을 수 없어요. 걷잡을 수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합니다. 저주해요. 가룟 유다는 목을 맸어요. 해소되지 않는 어떤 답답함 때문에 그냥 죽음으로 끝내버렸어요. 여러분은 이것이 해소되지 않아서 죽고 싶은 생각이 없으셨어요? 이 복음 들으면서 말이에요? 어디에다 찧고 싶은 생각이 없으셨나봐요? 자, 이 답을 왜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죠. 그 답은 히브리서 2장 14절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마귀를 없이하시는 일이 누구의 일입니까? 예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요한일서 한군데 더 찾아서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나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일은 개인, 개인에게 믿음을 주어서 그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이루어주는 일이, 애초부터, 처음부터, 태초이전부터, 하나님과 주님이 애초에 약속했을 그때부터, 이미 그것은 예수님의 본래 업무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 마르다가 오해했어요. 제자들이 오해했어요. 다 오해했어요. 그리고 그 오해는 그 오해로 끝나야만 했어요. 오해를 본인이 깨고 오해하면 안 되었어요. 모든 사람들은 그냥 마귀의 일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 했어요. 그래야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마귀의 일을 멸하신 그 예수님만 혼자 구원받으시고, 혼자 구원받으신 그 예수님의 기준. 그 기준,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그 약속의 성취를 쭉 뽑아 올릴 때, 거기에 다닥다닥 붙어 나온 그 사람들이 소위 성도라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라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얼마나 특이한지요, 절대 바깥에서는 이 사람들의 정체를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해요. 이해할 수 없어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느냐 하면, 본인도 이해할 수 없어요. 본인이 거기서 딸려 나와도 본인이 이해할 수 없어요. 언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면, 주님이 이렇게 마귀 일을 멸한 거거든. 이렇게 할 때, 그때 그 순간만 잠깐 이해해요.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주의 일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을 개인에게 믿음을 주어서 개인을 하늘나라에 보내는 것, 그건 주의 일이 아닙니다. 주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이건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굉장히 헷갈리니까. 자, 이제 알았습니다. 자, 이제 성령 받았습니다. 주님이 마귀 일을 멸하신다는 그것을 저는 믿겠습니다. 이게 믿음입니까? 아닙니까? 헷갈리시죠? 벌써? 주의 일 아니죠? 성령 안에서는 주의 일이 뭐라고요? 이렇게 헷갈리는 거예요. 마귀의 일만 멸하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그러면 마귀 일을 멸하는 주의 일 빼고는 다 누구의 일입니까? 마귀의 일이 되는 겁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그 일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마귀의 일을 멸하는 그 일 빼고는 모든 일이 마귀의 일이 된다고요. 마귀의 일이. 그래서 주님의 믿음이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우리가 믿는다고 착각하는데요, "그게 마귀의 일이었습니다." 라고 등장할 때, 그게 마귀의 일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 마귀의 일을 주께서 멸하셨군요. 주께서 멸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게 주의 일인 줄 알았는데, 제가 주의 일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이 착각한 이것이 마귀의 일이었군요." 라고 할 때, 그게 바로 주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저는 여기에 오면서요, 그럼 주의 일이 아무것도 없네? 아니죠. 주의 일이 덮쳤죠. 널리고. 전부 주의 일이죠. 그 주의 일, 예수님의 믿음이 등장하는, 그것이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제가 오늘 오면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그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잘 가다가 길을 잃어버렸어요. 오늘따라 네비가 왜 이렇게 주인을 제대로 못 섬겨. 엉뚱한 데로 가는 거예요. 제가 여기 더러 왔었잖아요. 계속 돌아요.

그때 제가 툭 튀어나온 말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내가 진짜 이렇게 힘들게 주의 일을 하러 가는데, 주님이 안 도와주시네? 안 도와주시네?' 바로 그때 그걸 팍 뜯어내면서, "에이, 마귀야!" 할 때, 그게 주의 일입니다. "주여, 오늘 설교, 제가 적은 것 하나도 놓치지 말고 순서대로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믿습니다." 푹 뜯어내면서, "에라 이 마귀야!" 할 때, 그게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이 도처에, 주의 일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의 믿음이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오늘 제 딸이요, 제가 너무 긴장을 많이 하니까, 카톡을 보내 왔어요. "설교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기 고백을 해. 왜 그래?" 그래서 제가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믿음이 쳐들어오니까 그걸 알았던 거예요. 주님이 뜯어주니까 허풍과 엄살로, 덕지덕지 발라있던 것을 걷어치우니까 거기서 마귀가 나온 거예요. 거기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곡성이라는 영화에서 한 대사가 있어요. 그 영화에서 제일 멋진 대사에요. 무당이 하는 대사인데, 사람 아녀, 우리 몸뚱이가 있는데 사람이 아녀라? 사람 아녀? 귀신이여. 그거만 귀신이 아니고 너도 귀신이여. 너도 귀신, 나도 귀신, 다 귀신이에요. 사람 없어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 세상에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밖에 없어요. 아무도 사람이 아니었던 겁니다. 마리아의 착각은 믿음이 어쩌구, 저쩌구 그 부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 그게 착각이었던 거예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귀신이었어요. 어떤 귀신? 귀신이 뭐죠? 사람이 아닌데 왜 사람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냐구요? 지가 뭔데 예수를 믿어요? 지가 뭔데? 지가 뭔데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에 가요? 사람도 아닌 것이? 왜 마귀가 예수님 믿고 하늘나라에 갑니까? 마귀를 깔고 앉아있는 것이?

아까 저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던 제 딸이요, 저하고 언쟁하다가 그럴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진지하게 저한테 이야기했어요. 진지하게. 지도 철들고 어디를 같이 가는데, 저한테 그래요. "아빠는 아무리 봐도 성령을 못 받은 것 같아?" 그 뒤에 말이 더 재미있어요. "자기도 그런데, 내가 성령을 못 받아서 그런 줄, 나도 아는데, 당신은 성령을 못 받은 거 같으니, 그만 애쓰고, 그만 믿음 있는척하지 말고, 사람 아니야. 사람인척 좀 하지 마! 인간인척 좀 하지 마! 나랑 같이 지옥가자." 그랬어요. 우리 이렇게 살아요. 우리 집.

그래서요, 성령 안에 있는 사도들의 믿음을 고백하는 그 고백의 양상이 정말 신기해요. 제가 천지창조를 믿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사람이 아닌 것을 또 믿습니다. 제가 이제 마귀의 자식인 것을 믿습니다. 에이, 그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그거 아니에요. 뭐가 신기한지, 그걸 또 믿으려고 하지 마시고, 이거 확인하고 넘어가야 돼요. 제가 지금까지 뭘 믿으라고 한 적 없습니다. 없죠. 제가 지금까지 뭘 행하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죠? 생각해보니까? 여기서 짚고 넘어갈까요? 그냥 막사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그 상태에서, 제가 존재의 바다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쭉 가시는 겁니다. 허풍은 허풍대로, 엄살은 엄살대로 그냥 가셔야 돼요. 괜히, 제일 듣기 싫은 것이 순수한 믿음이에요. 순수한 믿음. 나 이제 복음 알았으니까 순수하게 믿는다. 그것도 걷어치워야 해요. 그게 더 악마 같아. 그게 더 마귀 같아. 듣기 싫어 죽겠어. 아주 그냥. 그런 것 없습니다. 아니, 있는데 아니라고요. 성경에 없다고요. 예수님 믿음 안에는 그런 게 없다고요.

사도들이 믿음을 표현하는 그 표현 양식, 이거는 정말 흉내를 못내요. 흉내 낼 수 없는 것을 또 말씀드릴게요.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같은 경우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자기를 치워요. 자기를 치운다고요. 이제 그 자리에,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그게 주님의 일하심이 자기를 치운 그 자리에 그게 들어온다고요. 여러분 하나도 안 놀래내요? 지금? 저는 신기해 죽겠는데. 그게 신기한 거예요. 그게. 사람들한테는 이거밖에 안 나와요. 예예. 제가 믿습니다. 이게 사람들한테 나오는 것, 전부거든요. 그거 말고 뭐가 나오겠어요? 예예. 주님 십자가 지신 것 믿습니다. 예예.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 믿습니다. 예예..예예..입을 확 꿰매고 싶어요.

그런데 사도들은 보세요. 그게 아니고, 사도들도 똑같아요. 사도들도 나오는데, 나오는 본인을 치운다니까요. 옆으로. 치우고, 치우고, 주님이 하신 일을, 마귀를 멸하신 일을 거기다가 장착한다는 것이, 그게 신기하다니까요. 하여튼 여러분이 신기해할 때까지 계속 이야기할 거예요. 이제 집에 안 가. 고린도전서 15장 설교 다 들으셨잖아요?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냥 입질하는 거 아니에요. 자기를 치우는 거라니까요. 내가 아니요, 그것도 치우고. 하나님의 은혜로다. 아휴, 이제 나도 모르겠어요. 거기다 모시는 거예요. 거기다.

또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요, 계속 할 거예요.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 주었으나, 그 둘은 아무것도 아니로되, 보세요. 또 치우잖아요. 신기하다니까요. 딱 치우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예하는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게 지금. 이게 뭐가 신기하느냐 하면, 도대체 어떻게, 피차 존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피차 똑같은, 피차일반의 사람, 그 사람, 그 사람이, 어떻게 치우냐고요? 저는 66킬로, 얼마 안 나가요. 목사님이 늘 그러시더라구요. 우리교회는 비만이 없어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요. 이 뚱뚱한 몸을 어떻게 치우냐고요? 어떻게? 이게 신기하다니까요.

요한일서 2장 27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지금 목사님이 시카고, 버지니아, 뉴저지..아휴, 제가 그걸 듣느라고 고생이 말이 아니에요. 제가 지금 미국에 있는 목사님께 광고하는 거예요. 우리교회 광고하는 거예요. 고생이 말이 아니에요. 고생이. 근데 그렇게 가르치면서 말이에요. 자기가 쏟아내는 그 내용을 치우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치우고 딱 거기에다, 이게 신기하다는 거예요. 자 이제 그 신기한 그 내막을 이야기해야 되겠죠. 그 이야기하면 대충 끝날 것 같아요. 시간 잘 맞췄어요.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거의 뒤로 가서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우리 다 같이 들었어요. 이제 또 하나 모셔오는 거예요. 잘 모셔 와야 하는데, 손상되지 않게. 우리가 수련회 때 다 같이 들었어요. 들으시면 금방 생각나실 거예요. 뭐냐 하면, 믿음리스트라는 거예요. 믿음리스트. 예수님 입장에서는 그걸 믿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 쪽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잘 믿습니다. 허풍떨고 엄살떠는 그 리스트인데요, 예수님 입장에서는 믿지마라, 믿지마라, 그 일곱 가지가 있어요. 일곱 가지. 제가 두 달 동안 외웠으니까 대충 나오겠죠. 일곱 가지. 한 번 해볼까요?

성전을 믿지 마라. 사람을 믿지 마라. 종교적인 관습, 형식을 믿지 마라, 그 다음에 과학적 대상으로써의 자연물, 해달별, 이런 것을 믿지 마라. 그 다음에, 절기, 때, 시간, 주님이 언제 오신다. 이런 것 믿지 마라. 아, 이제 될 것 같아요. 여기까지 왔으니까, 두 개 남았어요. 그 다음에, 끝으로 제일 중요한 거 두 개 남았어요.

구원자를 믿지 마라. 자기 자신을 믿지 마라. 이게 일곱 가지 리스트에요. 그거 믿지 마라고 하면 믿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 안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믿음 되는 거예요? 아니죠. 어떻게 치웠을까요? 어떻게 치우고 그 자리에, 희한한 예수님 믿음의 고백, 예수님 믿음의 표현, 예수님 믿음의 그 증거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어떻게?

아까 예수님이 하지마라, 하지마라 하셨던 이건 뭐예요? 이건 우리가 늘 몸에 칭칭 두르고 감고 살고 가는 우리의 주특기 같은 거예요. 그게. 아니야, 나는 ~~안 믿어. 제가 여태 설교 했는데, 우리는 진짜 그러지 않기. 그러지 않기. 칭칭 두르고 감고,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둘둘 감고 아주 한 바퀴가 아니라 아예 거미가 자기 먹이를 거미줄로 감듯이, 오래 먹으려고 그렇게 한 대요. 아주 냉동이 잘 된 상태, 냉장이 잘 된 상태로 그렇게 칭칭 둘러 있는 거예요. 그거 아시고 지금 예수님이 하신 소리에요. 예수님이 아시고.

성전을 믿지 마라, 사람을 믿지 마라, 과학적인 대상으로 자연물을 믿지 마라...어떻게 안 믿고 사는데요? 어떻게? 어떻게 성전을 안 믿어요? 어떻게 우리교회를 안 믿어요? 이 좋은 교회를? 거기에는 이것도 있어요. 네비를 믿지 마라.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정말 성령 받은 사람한테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사도들이 그 본을 보여 준 겁니다.

주님이 뜯어내주는 겁니다. 믿지 마라가 너보고 믿지 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누구 믿음입니까? 믿지 마라가? 예수님의 믿음이죠.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의 믿음으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뜯는 겁니다. 뜯을 때 아는 거예요. 뜯을 때, 아, 내가 성전 믿고 있었구나. 아닌 줄 알았는데. 내가 과학적 대상으로 자연을, 뭐 이런 것이 나한테 있었구나. 내가 마귀 자식 맞네. 내가 사람 아니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얼마나 주님이 막 뜯어내면, 막 살라고 하겠어요. 우리의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요. 그렇게 다 주님이 북북 뜯어내고 박박 찢어내고 하면서, 자기의 사랑과 자기의 소망과, 자기의  믿음을 집어넣는, 그 사건, 사건, 사건의 그 몸. 그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 사는데, 우리는 내 인생 사는데, 그거 아닙니다. 소급시켜주는 어떤 지점이 있어요. 뜯어내주는 어떤 지점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이래요. 나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기다려보세요. 주님이 지금 잘 굽고 있는 중이에요. 잘 익히고 있는 중이에요. 십자가라는 부지깽이로 푹 집어넣어서, 잘 익은 감자 구운 것을 지금 꺼내려고, 지금 준비중이에요.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조금만. "아이구, 이거 잘 익었네." 하시면서....,  

저는 사사기 강의 들으면서요, 처음 들은 말이 있어요. 죄의 숙성이라는 말. 처음 들었어요. 제가 그 말 듣고 아주 그냥 덮어버렸어요. 주님이 죄를 숙성시킨대요. 글쎄. 뭐요? 바르게 산다고요? 뭐여? 믿음으로 의롭게 산다고라? 여기는 니들이 올 데가 아녀? 누가 오라고 했는지 몰라도 잘못 왔어? 번지수 잘못 찾았어?

유다서가 마지막에 어떻게 끝나느냐 하면 이렇게 끝나요. 24절,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제가 성경 보면서 계속 놀라고 있어요. 저는 막 사세요. 막 사세요. 하는 그런 게 어디 돌아다니는 용어인 줄 알았어요. 근데 여기 나오더라고요. 거침없이. 거침이 없게 하시고. 이거잖아요. 네 글자를 한 글자로 줄여준 것 같아요. 막.

주님이 얼마나 뜯어내면 표현이 막 사세요. 얼마나 뜯어냈으면, 얼마나 사랑을 많이 줬으면, 얼마나 예수님의 믿음이 그렇게 폭포수같이, 이목사님 자랑하시던데. 나이아가라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에 들어가서 사진 좀 찍으려고 했더니 너무 해가지고 찍을 수가 없이 돼버렸다는 거예요. 여러분, 주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길래, 그 표현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표현 외에 달리 안 나올까요? 주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길래, 나는 개같은 여자일까요? 주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길래 우린 아무것도 아닐까요? 그렇게 밖에 표현 못 할까요? 그렇게 밖에?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막 살게 하시고, 막 뜯어내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자, 여기입니다. 여기에서 시작된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우리가 뭘 믿은 것이 아니었어요. 뭘 행한 것이 아니었어요. 여기서 흘러내려온 이야기였어요. 25절,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집 앞에 수면공원이라고 있는데요, 꽃 한 송이가, 수면에, 땅에 있으면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데, 그냥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면에 피었더라고요. 제가 꽃에게 말을 건냈죠. "꽃아! 너는 그렇게 예쁘게 피었니?" "몰라. 없어." 꽃이 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는 너는 누구니?" "나는 바람.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바람." 그 꽃은 뭐고, 바람은 뭐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이야기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꽃, 예수님의 바람. 예수님 이야기의 꽃, 예수님 이야기의 바람. 저와 여러분이 그 꽃, 그 바람으로 발견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잘해서, 내가 믿음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그걸 뜯어내면서, 내가 마귀 일을 멸했다 하시고 다 주의 일로 돌려 가시면서 찬양받으시는 주님. 한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그 사랑을 부어주시니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를 그저 아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고, 그 이야기 속에 푹 빠지는 것이 우리의 소원, 우리의 자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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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교회 주일오후설교 룻기 2장 20절(은혜)160918-오 용익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룻기 2장 20절입니다. 뭇기 2장 20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近族)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시어머니하고 며느리하고 대화하는 내용입니다. 언약의 땅인 이스라엘 바깥으로 나갔다가 쫄딱 망하고, 남편, 아들 둘, 남자들은 다 죽고, 미망인들만 셋 남았는데, 며느리 한명은 자기백성에게 다시 돌아가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이라는 며느리를 데리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와서 이삭 줍는 일로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그렇게 사는데, 이삭을 줍고 온 후 그날 저녁에 하는 하루의 대화내용입니다.

제가 이 본문에서 특이하게 본 것은 뭐냐 하면, 그 나오미의 시선, 제가 설교 제목을 은혜라고 했는데, 은혜의 지평이라고 붙이고 싶었거든요. 뭐냐 하면, 나오미가 그 은혜를 바라보는 시선, 또는 지평이 보통 그런 것하고 다르다는 겁니다.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보통 살아있다는 것과 생존한다는 것은 가운데 둑이 막혀있어 가지고 이쪽은 이쪽이고 저쪽은 저쪽이다. 그렇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겁니다. 살아있는 것은 내가 여기 살아있으니까, 죽은 것은 죽은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죠. 구분이 가는 건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망한 자와 생존한 자와, 이렇게 뚝을 터놨어요. 이런 점이 참 특이해요. 보통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어떤 시선이고 지평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복과 은혜, 이런 것을 유보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밀어놓는다는 거예요.

보통 교회가든, 절에 가든, 은혜를 구하거나 복을 구할 때, 어떻게 구하는 거죠? 이미 복과 은혜라는 것이 내가 구하기 전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정해놓고 달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잘 안 되면 내 정성이 부족하다던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복과 은혜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나오미는 그런 지평이 아니에요. 그런 시선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누구하나 다리를 거쳐요. “주님. 복을 나에게 주세요.”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그”라고 하는 어떤 제 삼자, 여호와하고 연결되어 있는 “그” 라고 하는 제 3자 사이에 어떤 복이 있다는 거예요. 근데 여호와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본문 끝에 보면, “우리의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여기가 복이 고이는, 은혜가 고이는 어떤 그릇 같은 건데요. 근데, “주세요!”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밀어놓는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안 보이니까, 그 복이 어떤 식으로 올지, 그 복의 내용이 뭔지를 일단 모른다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그가 무슨 일을 해야 해요. 지금. 그가 무슨 활동을 벌여야 해요. 그래야지 여호와와 그 사이에 있던 복이 지금 밑에 내려오게 되어 있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 참, 혼자 신기한데. 특이해요. 이게 특이한 거예요. “주세요!” “못 주겠습니까? 정성이 부족합니까?” 이런 식의 유보는 아니죠. 제가 말한 유보가. 밀어놓는다는 게, ‘좀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나중에 주실 건가 보다.’ 지금 그런 식의 유보를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른다고요. 뭐가 내려올지를 모른다고요. 하지만 뭐가 오긴 올 거예요. 그건 알긴 알아요. 하지만 밀어놓는 거예요. 구멍을 뚫어놓는 거예요. 왜? 저쪽에 달렸습니다. 이렇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특이한 것은 뭐예요? 사망한 자와 생존한 자의 사이에 뚝을 터놓는다는 것은 뭐예요? 자기를 빼는 거예요. 내가 관여할 사항이 못 돼요. 지평이 확 넓어졌으니까, 사람은 죽음 너머에 대해서 관여하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확 뚝을 터놨으니까, 자기가 관여하지 못하는 겁니다. 참 특이한 시선이에요. 두 번째 복과 은혜라는 시선도, 그것도 참 특이한 시선이에요. 그 다음에 나오미 지금 쫄딱 망해가지고 여기 온 거거든요. 지금 완전히 망했다 말이에요. 사람이 보통 실수하거나 실패하면 재기를 할 때 발판이 뭡니까?

이렇게 발판 삼습니다. 대개 다 그래요. 뭐냐 하면 반성하고 자기 처벌하는 거예요. 반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어디서 실패했는지, 어디서 잘못했는지, 그거 따지는 거예요. 따진 다음에 실패의 요소, 실수의 요소가 발견되면 거기에 대해서 자기를 처벌하는 겁니다. 자기의 뭐가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를 처벌하면, 그게 죄 씻음이 되어가지고, 자기를 구원에 이르게 해서, 그 의를 발판으로 그 사람은 다시 성공 쪽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게 보통 실패자가 옮기는 다음 행동이라 이 말입니다.  

근데 나오미가 쫄딱 망해서 온 사람인데, 그런 동선, 그런 움직임이 안 보여요. 오히려 반대로 상당히 뻔뻔한 것을 많이 보여줘요. 예를 들어서 자기 며느리를, 무슨 공작을 펴서 자기 며느리에게 누구의 발치로, 기업 무를 자의 발치로 들어가라고 해요. 뒤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전개돼요. 이거 참, 무모한 것 같기도 하고. 들어가라고 했거든요.

근데 성경이 재미있는 게, 꼭 도미노게임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나오미가 툭 밀어요. 나오미가 툭 밀면 룻은 툭 넘어지고. 그 모든 일을 저쪽이 다 해결해야 해요. 그리고 저쪽까지 왔는데, 툭툭툭 넘어져서 보아스까지 왔는데, 보아스가 보니까 자기는 기업 무를 자의 1순위가 아닌 거예요. 그럼 문제가 생겼잖아요. 그러면 또 실패잖아요.

실패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까 말한 실패했을 때의 순서를 밟아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룻기 3장 18절에 보면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해요. 자기가 일 저질러놓고. 문제가 생겼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해요. 어떻게 보면 뻔뻔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주변 상황들을 아예 안보기로 작정한 사람 같기도 하고. 이 룻기라는 성경이 어떻게 보면 보통 그런 상식을 가지고는 잘 이해해 할 수 없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고 있다 이 말입니다.

제가 지금 세 가지 특이한 점을 이야기했는데요. 첫 번째는 은혜의 지평이라는 것. 사망한 자와 생존한 자라는 그 둑방을 툭 터놓고 말이죠. 그게 뭐냐 이 말이에요. 사람은 이런 것은 아니에요. “내가 죽어서 천국가게 해주세요.” 그거는 지금 나오미가 말하는 그것과는 관계없는 거예요. 사망한 자와 생존한 자에게까지 열린 나오미의 지평은 아니에요. 그것은 이쪽에서 자기 욕망의 지평을 쭉 늘려서, 그냥 자기 욕망을 펼쳐놓은 것이지. 이거하고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평, 그리고 두 번째는 복과 은혜라는 것에 구멍을 뚫어놓고 유보하는 이런 것. 또 세 번째는 말씀드린 대로 실패에 대한 이상한 태도들. 이건 정말 실패한 자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이에요. 자,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오미는 그냥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실패한 사람이 아니고, 정확히 하면 이런 뜻이에요. 언약에 실패한 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언약에 실패한 자의 자리에 놓여 있는 사람이에요. 그 자리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런 희한한 지평이 열린 거예요.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헤를 베풀기를 원하노라” 이런 희한한 지평.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복은 그 분에게 달린 문제지,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런 희한한 시선. 이런 정말 희한한 시선이 온 거예요. 복은 나한테 와야지, 복은 내가 받아야지, 근데 어떻게 복을 밀어놓는 이런 것. 실패에 대한 이런 뻔뻔함.

그렇다면 잠정적인 결론을 하나 내릴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 자리가 복된 자리라는 겁니다.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라는 겁니다. 결국은. 그냥 있기만 했는데, 그게 은혜의 자리라는 거예요. 그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뭐냐 하면, 그게 은혜의 자리라는 거예요. 그게. 남들이 보면 저주받았는데, 아무리 봐도 저주받았잖아요?
남편 잃고, 자식 잃고, 며느리 하나 달랑 데리고 이삭 줍고 있는데, 그게 뭐가 복이에요? 아니 진짜 복 받았다니까요? 이게 뭡니까? 남들이 못 보는 것을 지금 봐야 복 받은 것이 아닙니까? 맨날, 남들이 챙기는 돈, 나도 예수 믿어서 챙기고, 남들 팔자 고치는 것, 신세고치는 것, 그런 것은 복 받은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거 죽으면 다 끝나는 문제입니다.

지평이 넓어져야 돼요. 확 터져야 돼요. 여러분 예수 믿으면서, 교회 다니면서 반성한다고 암세포가 없어지지 않아요. 그저 도 닦듯이 예수 믿고, 자기 고치고 하는 것, 죽으면 끝난다는 이 말을 지금 제가 하는 겁니다. 암 걸리면 다 소용없잖아요. 암세포가 그 믿음을 비웃어요. ‘웃기고 있네! 나는 자라고 자라서 니 믿음 좋다는 주둥이까지 막아버릴 거다.’ 이게 암세포의 믿음이에요. 무슨 암세포를 이겨요? 기도원에서 지금도 막.....,

자, 어떻게 이 자리가 복된 자리가 된 거예요? 그것도 실패한 자리가 말이에요? 이제 개념 하나 또 모셔 와야 해요. 뭐 실력이 돼야 말이지. 모셔올 수밖에 없어요. 출애굽기 24장에, 이건 지난 여름수련회 때 다 들은 거예요. 저만 들은 느낌이긴 해요. 언약 체결공식이라는 개념을 모셔오겠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하고 언약을 맺을 때, 언약을 이렇게 맺는다는 거예요. 열두지파 들어가고, 그다음에 법, 율법 들어가고, 이제 기억이 새록새록 나시죠? 그다음에 피 들어가고. 이렇게 해서 언약을 체결한 거죠. 그게 뭐냐 하면, 언약체결공식인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제사장 만드는 공식이에요. 언약의 나라, 피의 나라 만드는 공식.

그걸 옆으로 이목사님이 쓰시면서 붙였는데요. 밑으로 세우면 이게 성전 안으로 그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성전 안으로. 그렇게 해서 다시 새긴 돌판. 깨졌는데 다시 새긴 돌판 들어가고, 법궤, 언약궤 안에 들어가고. 그다음에 그 위에 시은좌, 은혜가 내리는 자리라고 해서 거기에 피가 덮이는 거예요. 거기에 피가 덮이면, 하나님은 뭐만 보시느냐 하면, 유월절 때처럼, 심판의 천사가 뭘 보고 지나가느냐 하면 피 보고 지나가는 거예요. 피를 보고. 그 안에서는 고기 뜯어먹고 있고. 죄인이라 이 말이죠. 띵가띵가~ 하고 있었던 거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복이 뭐냐 하는 거예요. 복이. 복은 다른 게 없어요. 그냥 다 덮는 것이 그게 복입니다. 시편 32편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그게 복이에요. 전부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법이 죄를 빨아요. 죄를 짓는다고 제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다 빨아요.
다시 말하면 더욱더 죄인 되게 만드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성령 받고 나서 그걸 알았던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 안에 들어갔으니까. 새 언약 안에 들어갔으니까요. 그 공식을 예수님이 그대로 이루시고, 새 언약에 들어가면 자리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정해진 자리가 있는 거예요. 막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죄인의 자리로 들어가는 거거든요.

사도바울이 그걸 알았어요. 율법의 기능이 뭔지 알았던 거예요. 율법이 왜 들어왔는지 알았던 거예요. 구원을 알려면 피만 들어오면 되죠? 그렇잖아요? 죄인과 피를 그냥 만나게 하면 돼요. 지금 이런 이단종파들이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성령 받았으니까, 니가 이제 주체가 되어서 주님처럼 니가 하면 된다는 이런 이단종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순서를 바꾸어놓았어요. 피 다음에 율법으로. 죄인, 피, 율법해가지고, 피로 구원받고 그 다음에 말씀 지키는 걸로. 아니에요. 주님이 이유가 다 있어서 순서대로 착착 다 집어넣은 거예요. 열두지파, 죄인, 집단죄인인 거예요. 율법이 들어와서 그렇게 만드는 거죠. 율법이. 죄를 전부 빨아가지고. 죄를 전부 빨아서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피쪽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피는 죄를 받고, 저쪽으로는 피의 효과를 전부 다 내보내는 거죠. 그 교환, 그 교체작업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 성전입니다. 죄 빨고, 피 덮고. 죄 빨고 피 덮고... 이렇게 계속해서 교환의 작용이 일어나는 거죠. 바로 그 교환의 작용 일어날 때, 그 피가 덮치는 자리,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이유 없이 마구마구 덮치는 거예요. 바로 그 자리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나오미, 룻이 같이 들어가 있는 그 자리인 겁니다. 그래서 그 희한한 은혜의 지평이 열린 거예요.

그러면 나오미나 룻이 그 자리에 쏙 빨려 들어가죠? 뭘 잘못해서요? 아니죠. 남자 잘못 만나서 그런 거죠. 남자 잘못 만나서. 남자 따라 나갔다가. 하여튼 남자가 문제라니까. 남자 따라 나갔다가, 남자가 잘못되니까 거기에 쏙 빨려 들어간 거예요. 그래야만 되었던 거죠. 그래야만 새신랑을 만나지 않겠어요? 지금 새신랑이야기에요. 새신랑. 그래서 성도를 신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도를 신부라고 하잖아요?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뭘 어떻게 해서, 내 팔자를 고쳐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자리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자리로. 그럼 남은 문제는요, 왜? 꼭 그 자리가 은혜 받는 자리에요? 다른 자리하면 안 돼요? 왜, 꼭 그 자리여야 되죠? 이건 참 빤한 이야기 같은데요. 이거는.

그게 바로 신랑이 정해주는 자리라서 그런 거예요. 니가 정하면 안 되는 거예요. 신부 니가 정하면 안 돼요. 신랑은 원래 다 덮어주는 분으로 오시는 신랑이기 때문에, 그 신랑은 다 덮을만한, 죄를 짓는 정도가 아니고, 죄인의 자리여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신랑과 신부가 딴딴따단~♬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성도의 복이란, 성도가 팔자 고치는 것이란,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새 남편이 거지같은 옛 남편에게 “저리가! 그지 같은! 니가 남자야? 너 같은 놈도 남자야? 저리가!” 하고 밀어내고, 그 자리에 새 남편이 들어오니까, 졸지에 복 받게 되었다는, 그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정말 졸지에 복 받은 거예요. 어떻게 하다보니까 정말 복 받은 자리에....,

이게 웬 복인지! 하다보니까 웬일로 내가 그 자리에 있고. 하다 보니 자꾸 은혜의 지평이 열리네요. ‘아니야. 아니야.’ 제가 수련회소감문 쓸 때 했는데요. 갈 때 보니까 제가 기운이 쏙 빠졌잖아요. 벤츠 타는 것 보고. 뭐야? 같이 수련회 참석했다가 누구는 벤츠타고 집에 가고? 아니 누구는? 소울도 좋은 차지만. 그랬다가도 자꾸 은혜의 지평이 열리는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이게 아니야. 이까짓 게 뭐라고? 이게 뭔데?’ 자꾸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요? 본인이 뭐가 달라서요? 룻과 나오미가 뭐가 달라서요? 덜렁덜렁 따라갔다가, 덜렁덜렁 망해서, 또 덜렁덜렁 이리 왔다가, 저리 왔다가. 지금 룻기 안에서 하는 행동들이 그냥 다 덜렁덜렁 이라니까요. 뭘 좀 차분하게 계산하고 하는 그게 없어. 저 밑에 자는 데에 들어가라. 들어가서 발 빼고 가만히 있어라. 무책임해요. 무책임. 성도들이 그래서 무책임한가? 우리교회 교인들이 그래서 무책임한가요? 형광등이 그렇게 나갔는데...아이구, 몇 년 전 이야기네요. 형광등도 목사님이 했다고 하고 저것도 목사님이 했다고 하고.. 그건 일종의 엄살? “아멘” 아멘?(하하하)

이제 마지막 이 이야기하고 가겠습니다. 애들 설교할 때, 삭개오 이야기가 나왔어요. 나무 위에 삭개오가 올라갔는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른 거예요. 삭개오는 일종의 호기심이었겠죠. 소문이 쫙 돌았어요. 근데 지목해서 딱 “너야! 너 내려와!” 그래서 제가 어린이들한테 그랬거든요. “너! 천국 가!” 그럼 제가 끝난다고 했거든요.

그럼 벌써 자리 끝난 거예요. “너는 죄인의 자리고, 나는 너를 용서해주는 자리야!” 그걸 끝났어요. 근데 그 삭개오가 얼마나 신났던지, 예수님을 초대해서 잔치벌이고, 그게 얼마나 좋았던지, 잘못 한 것이 있으면 재산의 네 배나 갚겠나이다. 이런 거 했단 말이에요.

뭐냐 하면, 신난다는 거죠. 예수님은 자기 백성 하나 찾아가지고, 참 좋아 죽겠고. 그리고 이 삭개오는 자기 자리를 찾아서 너무 신나는 거예요. 불행이라는 것, 딴 거 없어요. 자리 못 찾아서 헤매는 것. 죽어도 자리를 못 찾고 귀신처럼 헤매는 것. 그리고 구 귀신 짓을 여기서부터 하고 있는 것. 추석 때는 집에 갈까? 아님 여기 남아있을까? 올라가? 내려가? 여기가 내 고향이야? 저기가 내 고향이야? 자리를, 직업은 뭐며? 맨날 헤매. 헤매. 근데 우리도 똑같이 헤매요.

우리도 똑같이 헤매는데, 주님이 지정한 이 자리만 생각만 하면 참 부럽지가 않네요. 내 재산이 있으면 네 배라도 풀어서...제가 마지막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정말 본인이 그 자리에 있는 건지? 아, 나 그 자리 맞아? 내 자리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 정말 신나는 거 맞아? 돈이 신나는 것도 알고, 세상 사람들이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 그거 다 신나는 거 맞는데, 아니야. 아니야. 진짜 신나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오셔서 바로 니 자리는 여기야! 라고 딱 정해줬다는, 그 지정해준 그 자리에 아주 못으로 때려 박았네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십자가에 때려 박았어요. 정말. 그게 진정 신나는 건지? 건지? 한번 살면서 확인해보시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매일 확인하는 것은 나한테 잔고가, 은행의 잔고가 얼마나 있는지, 내가 앞으로 몇 살을 살 수 있는지, 내 자식새끼들한테 돈을 얼마를 물려줄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더 건강해서 이 세상에서 수壽를 남부럽지 않게 누릴 수 있는지, 그렇게 귀신처럼, 그런 자리를 찾아 헤매고 떠도는, 그런 귀신같이 떠도는 저희들, 더 이상 떠돌지 말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서, 그런 것 다 묻지 않고 무조건 용서를 퍼부어주시는 죄인의 자리에 두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주여! 남은 인생 살면서 우리가 과연 그 자리에 놓여 있는지, 우리가 진짜 그 은혜를 좋아하는지, 늘 확인하면서 살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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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9.20 -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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