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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서경수
Subject   한윤범 목사님 설교
우리교회 주일오전설교 누가복음 7장 18-23절(예수님의 실족)160911-한 윤범 목사

하나님 말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 18절에서 23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신약성경 딱 100쪽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여러분에게 오늘, 오늘도 좋은 날입니까? 좋은 날은 어떤 날입니까? 햇빛이 쨍쨍 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안 되는 일이 없고, 또 발걸음이 가볍고, 이것이 좋은 날입니까?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좋지 않는 날은, 바람이 불고 흐리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발걸음도 무겁고, 이것은 좋은 날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좋지 않는 날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항상 좋은 일입니다. 넘어지든, 자빠지든, 깨지든, 이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내가 예수 안에 있는지, 그것만이 우리에게 그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항상 최선의 것만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 복음 하는데, 복음을 싫어하는 이유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쭉 읽어가고 들여다보면 하나도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해봐야, 아, 이건 내가 할만하다. 하는 그런 것들뿐겠죠. 그러나 성경을 이것, 저것 읽다보면 지킬만한 것이 남아있질 않아요. 더군다나 여기 계신 분들처럼 복음, 좀, 아신다고 하시면 어느 것 하나 말씀이 만만하게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껄끄럽게 만들고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말들이 가득 차있어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힘겹게 하는 그 말 속에 담겨서 오신 거예요. 요한복음이 그렇게 시작하죠.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셨다고. 그 육신이 되어서 오신 그 예수님 속에 바로 우리를 힘겹게 하고 껄끄럽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오신 예수님께서 말씀 하나하나를 전해주시면서, 이게 복음이야. 이게 구원하는 것이야. 하면서 우리에게 밀어붙이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잖아요. 하늘에서 오신 분이 하늘의 이야기를 하고 하늘의 증거를 지금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땅은 너희 집이 아니고 하늘이 너희 집이야. 하시면서 하늘로 이끌어 가시는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성경 말씀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라는 이런 말씀. 아주 마음이 급하고 다급해서 하시는 느낌이 들어요. 거듭, 거듭 강조하는 거죠.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가 꼭 필요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꼭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늘의 말씀을 전하면서까지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우리에게 건네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복음이 그냥 시중에 통용되는 충고처럼 들리는 모양이에요. 여러분 충고가 뭡니까? 대개 충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충고에요. 충고를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요즘에 애들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합니까? 부모가 자식한테 좋은 이야기를 좀 해주면 아이들이 뭐라고 해요? “아, 예~ 아, 네~” 그리고 고개를 쓱 숙이죠. 그 숙이는 머리 위로 충고는 다 지나가버리죠.

복음도 그렇습니다. 정말로 주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지 않는 이상은 주님의 말씀이 그냥 충고처럼 들리지. 정말로, 진짜로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복음이 정말 우리에게 담겨지면 복음이 사라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복음이 살아서 계속 우리를 끌고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의식할 수밖에 없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가지시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던져주시면서 이 말씀이 하늘에서 온 말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넘어지든, 깨지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계속 밀어붙이시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장로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요? 도대체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누가복음 1장을 시작하고 끝부분에 가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이야기 나옵니다. 67절에 보면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예언을 했다고 했습니다. 예언을 하면서, 쭉 길게 이야기하는데, 그 내용이 하나님의 찬송으로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찬송할 때, 죽어가는 것이 있어요. 인간은 죽어갑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고 우리는 죽는 거예요.

사가랴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잖아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본문을 보면, 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어두움과 죽음에서 평강의 길로 인도하는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불러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그런데 사가랴는 그렇게 사용되어지고 있는 세례 요한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만 찬송하고 있는 거예요. 높으신 이가 맹세한 거룩한 언약을 수행하실 때에, 세례 요한은 제물로 사용되는 겁니다. 그렇게 사용되어지는 것을 찬송하고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7월 어느 날 영동고속도로 봉평 터널 앞에서 관광버스가 추돌사고를 일으켰었죠. 그래서 젊은 여성 네 명이 죽고, 수 십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딱 우리 딸 나이또래에요. 대학생이에요. 그 학생들 중에 하나가 수진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수진이 아빠가 나중에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천사가 된 딸을 만나기 위해서 그만큼 신앙심이 깊어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전에는 잘 다니지 않던 교회를 열심히 출석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어떤 말을 덧붙이느냐 하면, “딸을 너무 하나님이 필요로 해서 일찍 데려갔다고 믿고 있다.” 라고 말을 덧붙였어요.

하나님께서 수진이라는 학생을 필요로 해서 데려간 것입니까? 제물로 쓰신 거예요. 유통기한이 끝나서 폐기처분 했다고 하면 너무 삭막하고, 너무 억울하고, 너무 원통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세요?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여러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인생 모릅니다. 어떻게 될지....,우리 인생이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사가랴가 예언한 것을 한 대목 더 살펴보면, 누가복음 1장 77~78절에 이어지는 내용인데, 77절,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라고 했어요.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시는,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을 알게 하신다는 거예요. 구원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긍휼히 여겨주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른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근데 그가 조금 일찍 죽었다, 험한 모습으로 죽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구원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구원을 하시는데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그런 교통사고처럼. 우리가 잘 아는 많은 사건사고처럼.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이 실족케 하는 상황인데, 실족하는 상황에서, 실족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닥쳐지면 우리는 어때요? 우리는 실족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넘어지는 거예요. 실족하는 상황이 우리에게 덮쳐왔는데, 우리는 어떻게 할 거예요? 버티는 거예요? 버티면 됩니까?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실족하게 하거든, 실족하는 상황이 오면, 잘라버려라. 그 실족케 하는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와 있는 이야기잖아요. 내 눈이 실족케 하면 빼버리라고 하고, 내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잘라버려라. 눈 하나 빠지고, 팔 다리 하나 잘라버린 채로 지옥 가는 것보다 천국 가는 것이 훨씬, 이건 뭐 비교가 되지는 않지만은 말을 만들자면, 비교해서 훨씬 낫다는 식으로 표현하잖아요.

그런 실족케 하는 상황이 오면, 넘어지는 상황이 오면 넘어질 수밖에 없고, 실족할 수밖에 없고, 자빠집니다. 깨집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거예요. 지옥에 안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이 과연 뭡니까?  사가랴의 예언 한 번만 더 보겠습니다. 71절,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이게 복음이에요. 우리의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는 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알려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당도하면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왔으면, 또 내가 그 기쁜 소식을 누리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되고, 당연히 여러분 알리고 계시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인기를 끌어야 되잖아요. 근데 그 기쁜 소식보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 왔다고요? 하늘에서 온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하늘에서 온 말씀이 정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기쁜 소식이고, 나를 정말로 미치게 만드는 것이라면,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내가 다른 것에 기쁜 것을 두고 있다는 것이죠. 더 좋아하는 것이 다른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기는 어디에요? 우리가 사는 이 땅이죠. 땅에서 그것을 찾고 그것을 구하고 땅에서 그걸 얻는 거예요.

요즘 땅에서 얻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에요? 도대체? 누가는 좋을 것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죠. 야고보 사도도 좋은 것은 땅이 아니라, 각양 좋은 것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그랬어요. 하늘에서만 오는 거예요. 우리는 이 비교를 할 생각을 안 하죠. 그죠? 땅이 너무 좋고 기쁘고 내 몸을 편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 비일비재한데, 하늘의 것은, 여러분 하늘의 것을 받은 것 중에 어느 것이 여러분의 몸을 기쁘게 하고 편하게 하던가요? 이 말씀을 들으면 기쁘고 편합니까?

이 근호 목사님이 가끔 여기서 복음 듣고 기뻐하는 것이 몇 초라고 합니까? 3초라고 하잖아요. 3초. 사실 정확히는 0.3초입니다. 우리 의식이 왔다가 나가는 시간이 0.3초입니다. 아, 이건 후하게 쳐주신 거예요. 열배나. 열배나 후하게 주셔서 3초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의식이 왔다갔다, 그냥 0과1, 컴퓨터에 언어처리처럼 0과 1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순간에, 왔다가 갔다가 하는 거예요.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하는 거예요. 복음이 기뻤다가, 아니면 딴 것이 기뻤다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어디로 갑니까? 우리가 하늘로 갑니까? 아니죠. 우리가 살고 있는 땅으로 가는 거죠. 흔히 교회에서 이 복음을 팔기 위해서 별별 짓을 다 합니다. 거두절미하고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고 했어요. 그러면서 바로 “하나님을, 예수 믿는 자는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하죠. 여러분이 다 아시는 유명한 전도문구 하나 있잖아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된다는 거예요. 일단.

일단 끌어 모아야,  뭐 복음도 전하고, 뭐도 하고, 할 게 아니냐는 거죠. 일단 끌어 모아야 된다는 이런 오래된 논리가 교회를 완전히 삼켜버렸어요. 교회가 완전히 이 세상 아수라장 판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이 교회 안에서 세상에서 통용되는 모든 기법과 수법들이 다 동원되고 사용됩니다. 우리 집 거실 창으로 언덕위에 있는 교회가 보이는데, 아주 큰 교회에요. 그 교회를 지으면서 밑에 카페를 넣어놨습니다. 그리고 값비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도 넣어놨습니다. 물론 저는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만, 거기 보태 줄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서 일단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된다는 거죠. 그래야 뭘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 끌어놓고 뭘 했습니까? 복음을 전했습니까? 모아놓고 자기들 살 궁리를 했잖아요. 또 거기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이냐를 했잖아요. 결국은 복음을 가지고 장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복음이 미끼상품으로 사용된 거예요. 우리교회는 복음을 전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모아놓고. 우리는 소비 사회에서 종교도 하나의 소비의 대상이 돼버렸어요. 그 소비 주체자가 된 내가 돈을 지불하고, 시간을 지불하고,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투자한 만큼 얻어야 되잖아요. 소비 주체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내가 투자한 만큼 얻어내야 되겠다는 거예요. 이익을 얻고 영광을 얻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을 보면 다 그래요. “교회 왜 가냐?” “복 받으려고 가지.” 그걸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익과 영광을 제공해주지 않으면, 그 교회는 부흥하지 못하는 거죠.

복음은 동기부여를 하지 않습니다. 동기부여를 해야, 뭔가 감언이설로 흡입하는, 어떤 흡입력이 있어야, 사람들이 모이고 꼬이고 그럴 텐데, 장사도 잘 될 텐데, 되지를 않아요. 복음이 동기부여가 안 되는 이유는, 다른 것 없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를 세워놓고 그 앞에 오는 모든 자를, 죄인인 것을, 죄를 다 까발리고, 다 밝혀놓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동기부여가 되겠어요? ‘내가 죄인이야. 나는 죄인이구나.’  라고 그 알아버린 것을 붙들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먹고 사는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어떤 방법과 수단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거예요. 더더군다나 십자가는 멀리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맞아.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서 이 땅에 오신 거야. 정말 감사하구나. 내가 그 은혜를 갚아야지. 은혜에 함께 해야지.’ 하면서 따라왔다가도 십자가를 턱하니 마주하는 순간, 그냥 놀래서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죠. 여러분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서 반복하면 너무 지겹지 않습니까?

제가 매주 목사님께서 하신 설교를 듣습니다. 때로는 동영상도 보고, MP3도 담아서 듣기도 하면, 여러분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매주 다양한 세상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이야기를 하고, 복음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결론은 언제나 우리가 짐작한 결론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죠? 그것을 매주 듣는 여러분은 또 어떻습니까? 지겨운 생각이 들고, 뭐 맨날 똑같은 이야기, 오늘 하루 쉬지. 뭐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 수도 있어요. 그렇죠?

결코 달콤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달콤한 이야기도 한두 번 들으면 지겨워지는데, 정말로 우리를 멀리하고, 우리를 떠나보내는 그러한 이야기를, 매주 매 시간 계속해버린다면, 우리는 너무 미쳐버릴 것 같을 거예요. 오늘 본문에 세례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이 입바른 소리를 해가지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죠. 옥에 갇힌 다음에 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그 앞서서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이 등장했을 때에,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사람이 낳은 자 중에 정말로 놀라운 자라는 그 말씀 그대로, 정말로 뛰어난 사람인줄 알았어요. 옛 선지자 중에 한 분이 오신 줄 알았어요.

그래가지고 혹시 세례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떡 하니 옥에 갇힌 거예요. 그리고 목 베임을 받아서 죽잖아요. 그걸 보고서 유대인들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 저 사람도 아니구나. 저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마음을 주려고 했는데,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어요? 세례요한도 자신이 옥에 갇히다 보니까 거기서 뭘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교도소 1년 있으면서 책을 몇 권 읽고 이런 것 있잖아요? 거기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고, 하다보니까 오늘 본문이 나오는 질문을 한 거예요.

세례요한의 질문이 뭡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런 질문을 한 거예요. 오실 그 이가 예수,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데, 육에 속한 나로서는, 당신이 하늘에 속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한 거예요. 육으로 둘러싸인 이 모습을 가지고 하늘에서 오신 당신을 눈으로 보고 있지만, 정말 당신이 메시아인지, 메시아가 맞는지 아닌지 정말 나는 모르겠다. 그렇게 하면서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묻게 한 것이죠.

예수 믿게 세례요한이 신나게 복음을 전했잖아요. 그러나 지금 그 결과 뭡니까? 세례요한도 아마 그러한 상황을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오긴 왔는데, 정말 저 분이 우리가 기다리는 그 분이 맞는지. 아리까리하고, 그러니까 가서 한 번 물어봐. 이렇게 됐던 거죠.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 선생 요한의 질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마음속에 의구심이 들어있는 거죠. 세례요한의 생각과 사고가 그 머리와 심장의 엇박자가 일어난 거예요. 실족해버린 거죠. 실족한 상황에 빠져버린 거죠.

복음을 우리가 생각하면 되는데, 복음을 우리가 꾸준히 알면 되는데, 다른 생각이 계속 들어오는 것이 문제에요. 생각이 많으면 우리 신체 장기 중에서 비위를 상합니다. 비위가 비장이죠. 생각에, 생각에 계속 꼬리를 물면 왠지 배가 아픈듯해지지 않습니까? 거기가 바로 비위에요. 비위가 상하면 소화도 안 되고 면역체가 깨져가지고 몸이 안 아픈 데가 없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그 불타는 마음은 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서 어긋나버린 거예요. 불화가 일어난 거죠. 바로 이런 지점이 마귀가 쓰는 전략입니다.

마귀는 어떤 전략을 쓰느냐 하면, 분할통치를 해요. 여러분 분할통치 아시죠? 분할통치는 어떤 큰 나라가, 제국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것이 분할통치잖아요. 서로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어떤 형식으로든 나누는 거예요. 서로 반목하고, 서로 경쟁하고, 서로 싸우도록 유도하는 것이죠. 마귀가 우리를 분할통치해서 우리끼리 싸우고 경쟁하도록 만들었어요. 십자가로부터,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드는 거죠. 실족하는 상황은 바로 그런 상황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놓여져 있을 때,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어? 주님. 제가 주님을 열심히 믿고 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고 따지기 전에, 다 마귀 짓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더 그 일을 진행하기 쉬울 텐데,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죠. 세례요한이 지금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지금 그 자리는, 실족한 그 자리는 주께서 만든 자리입니다. 처음에 말씀을 드렸잖아요. 제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냥. 모든 인간을 그냥 그런 식으로 갖다 쓰시는 겁니다. 누구든지 마음대로 그냥 주님이 쓰시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해결책은 뭐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도대체 그 메시아를 어떻게 판별하는 것이 맞습니까? 마침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요한의 질문을 예수님하고 있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 주변에 각종 병든 자들이 다 몰려들었어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 22절의 말씀이에요.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라고 한 거예요. 이게 내 답이야. 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 일이 세례요한이 말한 오실 그 이가 맞다는 거죠. 메시아가 맞다고 지금 확실하게 증거로 한 거예요. 시연을 한 거예요. 실제적으로 보여준 거잖아요. 자, 그럼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가서 이야기를 했겠죠.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께서 시연하고 말씀에 나오는 대로 병 고치는 사건을 보면 믿어지십니까?

우린 이런 것을 체험신앙이라고 합니다. 체험신앙. 병이 들었는데 뭐 기도했는데 나았더라. 뭐 이런 식의 신앙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봤잖아요? 그죠? 오늘날에도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하는, 누구한테 이단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신 끼 있는 여전도사라든지, 주로 여전도사들이 많죠. 어떤 기도원원장이라든지, 뭐 치유의 은사가 있는 목사라든지, 뭐 안수하고 별 짓을 다하고. 근데 병이 낫는 일들이 어쩌다 가끔 있기도 하잖아요.

옛날에 뭐 김계화 원장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어요. 기도원도 크게 하고. 그 기도원 옆에 옹달샘이 있었는데, 옹달샘의 물을 작은 병에 오만원인가, 하여튼 비싸게 해서 팔았습니다. 오늘날 그 소식을 우리가 들었으면, 아마 저도 사다 먹였을 거예요. 우리 애가 심한 아토피가 있어서 세상에 좋다는 물은 다 갖다 먹이고 있습니다. 느릅나무, 또 어떤 사모님이 이야기해줘서 맹감나무열매..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물은 거의 다 먹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힘들잖아요.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잖아요. 너무 답답하잖아요. 백약이 무효한 그런 상태라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우리 마음이에요. 그런데 어쩌다가 나은 거예요. 귀신이 쫓겨나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런 거 보면 믿어집니까? 그게 믿음의 근거가 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로마서 1장을 보면 세상 만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지금 우리의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들이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걸 우리 스스로 나눕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의 일. 아,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님. 치유 은사가 안수해서 병이 나은 것은 하나님의 일. 병원에서 의사가 고친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그냥 의료기술로 나은 것. 그 차이가 도대체 뭐예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천국이 하나님이 하신 일인 것처럼, 지옥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우리가 하늘의 일로 이 세상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정말로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교인이 물밀 듯이 밀려와가지고 만 명씩 모이고. 벌써 여기 우리교회만 해도 몇 년 입니까? 2001년도면 16년, 17년 돼가잖아요. 만 명은커녕, 백 명도 안 되잖아요. 또 땅 사고 수천억짜리 예배당 짓고. 자,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칩시다. 그러면 그 반대로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은 어떻게 할 거예요? 개척교회 20년 해도 만 명은커녕 백 명은커녕 열 명도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저희는 주일마다 저희 집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도대체 어디에 속하는 겁니까? 이건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근데 그렇게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거기서도 다 큰소리 치고 삽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이 아니신 겁니까? 천국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면, 지옥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상황이 저주받은 상황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야 되나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해야 되나요?

그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 여러분에게 질문을 했죠. 오늘도 좋은 날입니까? 제가 ‘오늘은’ 좋은 날입니까? 라고 묻지 않고 ‘오늘도’ 라고 했습니다. 아, 이거 ‘은’과 ‘도’의 차이도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거예요. 어제는 좋은 날이고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은, ~은으로 이렇게 붙일 수 있지만, ~도라는 것은, 딱 그거만 한정하는 거잖아요. 내일도 모르는 거죠.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고 주님의 날 일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보고 주님이 하신 일을 보았을 때에, 그 들이대는 잣대를 늘였다, 줄였다, 우리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있는 그대로 봐야 되는 거예요. 성경은 있는 그대로 보면 세상 모든 일이 주님이 하신 일이 돼버리는 거죠.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해독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일들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그 모든 상징은 다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우리는 어떤 것에 혹하고 어떤 것에 빠지느냐 하면, 잘 되고 멋진 것에 빠지잖아요. 세상에서 잘 되는 것들, 교회를 개척했는데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리고 또 땅을 사서 예배당을 짓고 하는 일들이 우리 눈에 잘 되는 것으로 보여 지는 거잖아요.

이것은 바로 마귀가, 세상이라는 타자가 우리에게 덧씌운 아우라에요. 그것이. 그 광채라는 아우라에 놀라가지고, ‘아, 저것이 하나님의 일이구나. 하나님의 은혜구나. 하나님이 아니시면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가 있어?’ 서초역 앞에 어마어마한 큰 교회가 있습니다. 지은 지 얼마 안 됐어요. 그 교회를 소위 말하는 헌당예배를 드릴 때, 그 교회 본당에다 큰 플랜카드를 걸어놨어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런 식의 문구를 하나 걸어놨어요.

자, 거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 안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동의했어요. 맞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지. 하나님의 권세로 뭐 나라 땅 밑으로 자기들 교회 통로를 다 만들 수 있고.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이게 바로 악마가 덧씌운 아우라입니다. 우리 눈은 그것을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그것을 꿰뚫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큰일 났습니다. 시간은 자꾸 가고. 우리 눈은 주님의 시간과 주님의 공간을 볼 수가 없어요. 주님의 시간에서 주님을 만날 수 없고, 주님의 공간에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 이것이 주님의 시간이고, 아, 이곳이 주님의 공간이라고 하는 그 순간 거기에는 주님이 안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바라는 그 때에, 그 장소에 머무르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가 예상하는 예상 밖에서 항상 주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자는 주와 동행하게 되어 있어요. 동행.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곳에 주님은 없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자는 주님과 항상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메시아를 왜 기다리십니까? 메시아를 누가 기다려요? 무엇을 위해서 기다리는 겁니까? 나잖아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는 우리를 위해서 보내신 것이 아니에요. 단 하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을 만들었어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한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유명한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구절이 있잖아요. 세상의 모든 창조가 주님을 위해서 있고, 주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우리도 하나님이 만드신 건데? 우리는 오로지 돋보이게 하기 위한 한분을 위해서 있는 나머지 엑스트라죠. 주님은 주인공이시고.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는 거예요.

오늘 세례요한이 나오는데, 여러분 세례요한이 말하는 대로, 세례요한이 전하는 대로, 세례요한의 뒤를 따르기를 원합니까? 당시에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이 메시아 같아서 잠시 동안 따랐어요. 아마 우리도 그럴 거예요. 처음에 세례요한이 전한 메시지가 복음처럼 들렸어요. 복음 전한 것은 맞죠. 복음으로 듣고 그것을 따르기 시작했을 거예요. 그러나 얼마 있다 돌아서지 않았을까요? 왜? 세례요한은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갇혔으니까. 그리고 결국 죽었으니까. 그런 세례요한을 왜 따라가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들춰보면서, 내가 성경을 잘못 읽었나? 다시 한 번 살펴볼 거예요. 어?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믿으면 옥에 갇히는 거야? 그러는 거야? 그럼 예수 믿어야 되는 거야? 어떤 거야? 우왕좌왕하고 또 정신없이 살펴보겠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애굽에서 탈출을 시켰는데, “하나님 이건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너무 오버하신 것 같습니다.” 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이런 겁니다. 그저 애굽 그 땅에서, 이 세상에서, 조금 편하게, 조금 고생 덜하고, 조금 낫게 사는 정도지. 모든 것 다 파하고, 다 팽개쳐버리고 홍해 건너서 주님이 인도하신 땅으로 가는 것 까지는 너무 주님이 오버하신 것이 아니십니까? 라고 한 거예요. 그 증거가 그 뒤에 출애굽기, 민수기에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큰 건수로만 열 건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고, 여기서 시원하게 욕을 해야 하는데, 난리를 친 거예요.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서로 맞지 않은 것이 그러한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 버린 거예요. 땅의 것이 하늘의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예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라는 것이 그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 버린 거예요. 길을 잃어버리지 않은 자가 길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쫓겨나 보지 않은 자가 거기서 나와야 된다는 생각을 도저히 이해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떠나가기를 왜 싫어하는지를 아십니까? 이 땅은 내가 사는 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이 땅을 떠나면 어디로 가는데? 그럼 죽는 것뿐인데? 그것이 두려우니까 여기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우리가 하늘에서 쫓겨나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이 없으니 떠날 생각을 하겠어요.

여러분, 짐은 어떻게 쌉니까? 우리 집 앞에 인천 가는 리무진 버스가 서는 정류장이 있는데, 가끔 보면 조그마한 아가씨가 자기키보다 더 큰 여행가방을 들고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 그러나 이 땅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여행이라도 저 같으면 짐을 가볍게 챙길 것 같은데. 나그네의 짐은 가벼운 것이 최고입니다.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봐야 짐만 돼요. 우리 여름, 겨울 수련회 하잖아요. 저는 항상 가방 하나 딱 들고 갑니다. 처음에 저도 45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갔어요. 거기 가득 채워서. 제가 지금 가방 하나 들고 왔는데, 저 가방은 15리터짜리밖에 안 됩니다. 기껏 해 봐야. 갈아입을 옷 하나. 칫솔. 하나. 수건이나 치약, 샴푸 다 제공되니까 안 가져가도 되고. 우리의 짐은 가벼운 것이 좋죠.

예수님에게 좋은 것이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주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갇히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니죠? 그렇죠? 그저 매끄럽고, 부드럽고, 건강하고, 능력 있고, 폼 나고, 예전의 어떤 목사는 파워 크리스찬 이런 이야기하고. 요새는 섹시하다는 말이 칭찬처럼 들리는 시대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말들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요새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는 귀여운 남자들을 좋아한답니다. 혹시 알아두십시오. 우리 딸도 맨날, 아빠! 아빠! 누가 귀여워. 누가 귀여워. 어떤 때는 저한테도 귀엽다고 해요. 허, 참나.

이제 말씀이 마지막 부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제 관건은 예수님을 만나서 실족하느냐, 아니면 그 예수와 동행할 것이냐가 남아 있어요.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떤 감으로 있느냐 하면, 뭐가 문제야? 실족하지 않으면 되잖아? 어? 조심하면 되지? 여기계신 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실족하지 않으려고 생각해요.

실족하는 그 상황에서 넘어지고 자빠지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 버티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복이 있는 자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무슨 수로 버팁니까? 실족하는 상황이 와버렸는데, 넘어지는 것이 마땅한데 넘어지지 않고 있을 수 있는 능력자가 과연 누구에요? 실족은 온 거예요. 이해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고, 해독할 수 없는,  그런 불가사의한 아픔이, 그런 죽음이 상징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거예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 33절에서 이사야를 인용하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주님께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둔 거예요. 이 땅에 둔 거예요. 누구나 그 앞에 가면 부딪히게 되어 있고, 누구나 그 앞에 가면 넘어지게 되어 있고, 깨지게 되어진 거예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깨진 다음에 보자는 거예요. 넘어진 다음에 보자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깨지기도 전에, 우리가 지레짐작으로 그것을 피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피하게 해주시는 것을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대못 박힌 그 예수님을 두고, 상처 없이, 매끄럽고 우아하게 폼 나게 예수 믿는 것이 가능합니까? 소위 예수님을 대상으로 성화를 그린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에, 발에 박힌 못 자국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머리에 쓴 가시관, 그 핏방울 하나하나 아주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그것을 볼 때에, 그 연민을 일으키고 어떤 동정심을 갖게 만들고, 우리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그런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예수님의 온 몸은 상처투성이고 그 깊은 상처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주는 이런 낯선, 이런 부정성이, 상처 없이 매끄럽고 폼 나게 예수 믿을 수 있다는, 우리의 안일한 생각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립니다. 그리고 불가능의 가능성에 우리를 소름 돋게 만듭니다. 우리는 도대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주님은 불가능하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넘어뜨리고 자빠트린 이후에 이것이 나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그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소름끼치는 것이잖아요. 아, 이게 복음이구나! 물론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한테만 해당되는 사항이죠. 아, 시간이 다 가서 큰일 났네.

십자가가 온전하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1번. 십자가가 완전함과 어울린다. 2번.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성령 받은 사람들은 어울린다고 합니다. 어울린다고 해요. 그러나 대개는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왜 어울리지 않느냐 하면은 십자가에는 피가 있잖아요. 흠이 있잖아요. 티가 있잖아요. 오염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완전한 것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생각한 거예요. 거룩에 대해서 오해한 거예요. 자기 위주로 그 이상을 생각해버린 거예요. 주님이 뜻이 전혀 거기에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시간관계상 빼야겠습니다. 애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저 마음에 드는 구석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알량한 자기경험 때문에 그렇죠. 자기 경험에 비추어보니까 애들이 하는 짓들이 참 더럽고 추한 짓만 하는 거예요. 애들이 길 가다가 그냥 작은 나무 조각 만지고, 만들고, 하다못해 어떤 때는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를 주무르고 그럽니다. 눈알 빠진 인형을 내 친구라고 하면서 끌어안고 자고, 또 귀 잘린 강아지가 예쁘다고 쓰다듬고 그래요. 어른들이 보면 꼭 정신 나간 것 같아요. 뭔가 덜 떨어지고 뭔가 빠진 애 같아요.

그러나 그건 우리 생각입니다. 우리는 아주 계속해서 아주 매끄럽고, 부드럽고, 이런 것들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쁜 것들을 권하는 거예요. 너 그렇게 더러운 것을 만져가지고 어떻게 할래? 더러운 것을 만지면 병들잖아? 아프잖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도 똑같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의 오염되고 더러운 것들이, 우리에게 비쳐지는 그 모습들이 마음에 들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예수님이 피를 다 뒤집어썼잖아요. 물과 피를 다 흘려버렸잖아요. 이상을 그리워하고, ‘아, 이게 이상적이야. 이게 완전한 모습이야.’ 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또 그것에 대해서 강박을 보이는 것은 지금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그 이상적인 것이라고 그리는 그 이상화작업을 누가 합니까? 내가 하고 있잖아요.

그 이상적인 것을 그려놓고 거기에 비쳐보니까, ‘아, 오늘 내가 산, 내 삶이 만족스럽지 않고 거기에 맞지가 않아.’ 라고 또 누가 하는 거예요? 그것도 내가 하는 거잖아요. 북치고, 장구치고 내가 다한다니까요. 완전히 내가 신이에요. 내가 신입니다. 근데 여러분 잘 알아두십시오. 원래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그 전공자는 하나님이에요. 주님께서 원래 그렇게 하십니다. 주님이. 주님이 하겠다고 나서는 일을 왜 내가 하겠다고 나서는지 모르겠어요. 편한 길을 놔두고 왜 자기가 사서 고생하는지 몰라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아무도 없도다.” 라는 말을 계속해서 들려줘도, 내 이상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 길로 가려하지 않고, 그 진리를 들으려하지 않고, 그 생명이 정말로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과 십자가를 가르치실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렸습니다. 그리고 실랑이를 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그 밑에서 여러 가지일들이 일어났잖아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장로들이, 또 대제사장이,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니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라고 하면서 희롱하고 까불고 하잖아요. 그 이유가 뭐에요? 그 십자가가 온전치 않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당신이 메시아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구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실족하기 전에 붙들어주시고, 만일 실족했더라도 다 털털 털어주시고 위로해주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에는 너무 흠이 많고, 틈이 있고, 티가 많아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이 구원 없습니다. 다시 생명도 없습니다. 돌아갈 길을 잃은 자가 그 길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상처 없이 사는 삶은 거짓된 삶이에요. 차라리 아픈 채 뒹구는 것이 낫습니다. 아무리 비루한 인생을 살더라도 주님과 함께 하면 거기가 천국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옥에 티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는 거예요.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람에 이는 잎새에도 나는..,하면서 덜덜 떠는 거예요. 거기에 마음이 쓰이는 거예요. 바람에 휭~하니 불 때, 내가 뭐 잘못한 거 없나? 내가 뭐 넘어지는 일 한 거 없나? 라고 마음이 쓰인다는 거죠. 십자가 하나면 끝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 안에서 평안을 준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너희는 세상 살면서 환란이 있겠다고 했어요. 거기 뒤에 붙이는 말이 기가 막힙니다. 환란이 있고 당황스런 일이 벌어지고 또 실족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담대하라고 합니다. 그 담대해야 하는 이유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옆에 계시면 혹시 예수님 붙들고, “예수님! 무서워요. 저를 붙잡아 주세요.” 하면, 예수님이 “그래. 담대해. 담대 하라!” 그럼 예수님 때문에 담대할 수 있지만, 근데 지금 예수님은 옆에 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잖아요. 말로만 그냥 막 던지는 거예요. 말로는 누가 못합니까? 근데 이 던지는 말씀이 이게 생명의 말씀이라니까요. 이게 길이라니까요. 이게 진리에요. 여기서 벗어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정보 하나 얻은 것 밖에 없어요. 정보라는 것은 듣고 그냥 흘리는 거예요. 오늘 있으면 내일은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비밀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밀의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그 십자가가 바로 비밀의 덮개에요. 비밀의 덮개. 그 비밀의 덮개가 열려져야 그 비밀이 폭로되어서 우리에게 전달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비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꽁꽁 감추어놨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 덮개를 열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덮개를 열려고 하니까, 밧모 섬에서 사도요한이 펑펑 울었어요. 그 덮개를, 일곱 개로 봉인된 그 인을 뗄 자가 없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5장에 나와 있는 말씀이죠. 그때 장로가 나와서 이야기합니다. “요한아! 울지 마라. 그 인을 뗄 자가 있느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가 뗀다.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그것을 뗄 수 있다. 그 인을 떼시는 어린양이 계신다. 울지 말라.”

그래서 십자가가 아무리 흉측하고, 보기 싫고,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들고, 힘겹게 만들더라도, 그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비밀을 풀길이 없습니다. 생로병사, 아귀다툼, 아수라장인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면서도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인 것을 아는 그 믿음이, 그 복음이 우리에게 당도하면 우리는 넘어지더라도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바로 주님의 말씀대로 복 받은 자가 되는 것이죠. 누구든지 예수로 말미암아 넘어지지 않는 그 사람은 복 받은 자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넘어지지 않는 자가 바로 복 받은 자입니다. 우리 구원의 비밀의 열쇠가 거기에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엄청난 난관을 뚫고 예수님과 동행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복 받은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비밀인 십자가를 완강히 거부하는 쪽에 서있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이 땅에 오신 그대로 또 저희와 함께 하셔서 그 비밀 된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알아듣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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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교회 주일오후설교 대하 20장 15-17절(이상한 전쟁)160911-한 윤범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역대하 20장 조금 줄여서 보겠습니다. 15절에서 17절까지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681쪽입니다.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지금 유다나라에 여호사밧 왕 때입니다. 이때에 모압과 암몬 기타 여러 민족들이 유다를 치러 올라왔습니다. 16절에 보면, 그때 시점에서 내일 일어나는 일이에요. 내일 너희가 마주 내려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스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그들이 올라온다는 거죠.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만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아주 이상합니다. 17절이죠.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지금 전쟁에 돌입을 하는 거예요. 연합군이 쳐들어오고, 여호사밧을 비롯한 유다가 그들과 전쟁을 치르러 마주나가고 있는 겁니다. 전쟁을 하려고 서로 여루엘 들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 전쟁은 너희에게 싸울 것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전쟁판이 벌어지고, 지금 두 양쪽이 대치를 하고 있는데 이 전쟁은 싸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전쟁하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전쟁이기에 이렇게 아주 요상한 전쟁을 합니까? 역대하 20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면 이 전쟁이 정말로 이상합니다. 갈수록. 여호사밧 왕이 전쟁터로 나가면서 찬양대를 조직을 하고, 노래를 불러요. 성가대가 나가서 찬양을 합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해서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쟁하면서 찬양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날마다 전쟁이에요. 회사에 출근하고, 학교에 아이들 공부하러 가고, 이거 다 전쟁하러 가는 거잖아요. 전쟁터로 몰아넣고, 전쟁판을 벌이고 있는데, 이쪽 상황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거예요. 너무 안일하게 보시는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그렇게 만만하게 여기십니까?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시는 그런 안목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거예요? 세상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분, 연세 지긋하신 분도 계시고, 다 살아와 보셨잖아요? 퇴직하신 분도 계시고. 인생 사시는 것,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노래로 부르고 난리에요. 그런 노래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야말로 전쟁터고 날마다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 같습니다. “자, 너희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고, 날마다 전쟁터로 출근하는 모양이라면, 한번 말해봐라. 너희들이 어떤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 도대체 무슨 전쟁을 하고 있다는 거야?” 라고 물으시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까요? 그 뭐 우리는 비루한 인생답게, 시시콜콜 별별 이야기를 다 하겠죠. “먹고 살기 힘듭니다. 애가 말을 안 듣습니다. 사업이 지진부진 합니다. 가을철이 됐는데, 가을 물건은 준비해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이래가면서 우리의 일들을 잔뜩 늘어놓겠죠.

그런데 인류역사 이래로 우리가 벌인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고, 그 목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항상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전쟁은 벌어졌어요. 그리고 승자와 패자는 있어요. 그것뿐이에요. 그냥 힘과 힘이 대결을 벌였고, 마주쳐가지고 싸웠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힘자랑한 거예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눌렀다는 그 결과만 그냥 나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많이 들어보셨죠? 약육강식. 적자생존. 그리고 승자독식. 이긴 자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가고.  

오전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제국이 통치할 때, 그런 식으로 통치하잖아요. 전쟁을 벌여가지고 완전히 집어삼키는 거예요. 1840년대에 멕시코 전쟁이라고 이름붙인 전쟁이 있었어요. 그때 막 미국이 시작할 때에요. 멕시코 전쟁에서 멕시코가 진 다음에, 멕시코가 가지고 있던 영토의 약 51퍼센트를 빼앗깁니다. 전쟁에 진 결과죠. 그래서 뭐 어떻게 됐습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건 뭐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크게 보일수도 있지만, 우리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뭘 요구합니까? “너는 할 수 있어! 잘하면 돼! I CAN DO IT!” 해가면서, 너는 할 수 있다고 격려를 하잖아요. 근데 사실은 그게 격려가 아니고 할 수 있다가 해야 된다는 것으로 바뀌어서 들립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부모가, 너는 할 수 있어! 라고 아이들을 막 독려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해야 된다는 당위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거기에 꼭 부모들이 덧붙이는 말이 있죠. “너는 할 수 있어! 그리고 해야만 돼!” 이렇게. “남들 그렇게 다 해! 혼자 힘들어하지 마!” 이거 부모인지 웬수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작동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개인이든, 어떤 모양이든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게 바로 전쟁이에요.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살면서 뭔가 극복해야 되고, 뭔가 이루어야 한다는, 하나하나가 다 전쟁이고 전쟁의 양상입니다. 극기하고 극복하는, 그 모든 것들. 그러나 이런 전쟁을 하면서도 주님이 우리에게 원래 마련해 주셨던 그 아름다운 동산. 그 최적의, 최고의 동산에 살아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잖아요? 거기서 쫓겨났었다는 것도 모르잖아요? 그런 기억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다 전부에요. 그래서 전쟁을 벌이면서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유도 없이 살아가는.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자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모든 인간은 길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산다고 살지만은,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없어요. 가는 목적도 없습니다.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거예요. 단 한 번도 그 잃어버린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우리가 쫓겨났잖아요? 쫓겨난 죄인에게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요. 쫓겨난 죄인들에게 출구는 없습니다. 출구를 찾으려고, 탈출을 하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치죠. 그 증거가 뭐야? 이렇게 하면 우리 역사가 이렇게 발전했잖아? 이렇게 진보했잖아요? 그런 것을 내놓잖아요. 날마다 계속 스마트 폰이 최신 폰으로 계속 나오잖아요. 1년 6개월, 또는 2년 주기로 또 바꿔야 되고. 약정을 그렇게 2년짜리로 묶어놓고 해서 이런 식으로 바꾸는 게 하는 거예요. 신제품이 나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구형 폰이 되어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게 발전한 겁니까? 그게 진보한 거예요? 그래, 바꿔서 좀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그래서 발전해서 뭐? 진보해서 어떻게 됐는데? 계속 이렇게 캐물어 가면 답이 없어요. 그러다 죽겠지. 뭐. 바로 그겁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죽으면 끝이지. 뭐 이러고 마는 거예요. 어느 놈은 죽어 봤어? 죽은 뒤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 죽으면 끝이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안 되는 거예요.

여전히 마지막 때에 세상이 불타버린다는 그 말씀을 뒤집을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세상 끝 날에 다 불태워버리고 우리가 자랑하는 그 진보니, 발전이니, 하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리잖아요. 오직 주 여호와의 말씀만 남는 거잖아요. 우리나라는 미국이랑 프로야구 경기를 하게 되면 챌린지라는 경기가 있습니다. 이 목사님도 가끔 야구이야기를 하시는데, 저도 야구이야기 잠깐 해보면, 그 경기를 보다 보면 아주 미묘한 상황이 있어요.

타자가 공을 쳤는데, 1루로 도착하기 전에, 1루 베이스로 도착하기 전에 이것이 아웃이 됐느냐, 세이프가 됐느냐 하는 판정이 애매한 거예요. 그래서 1루 심판이 일단 판정을 내려야 됩니다. 세이프이던 아웃이던.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랬을 때에 양쪽 중에서 불만이 있는 측에서 챌린지 신청을 하는 거예요. 이것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신청을 합니다. 그러면 심판들이 가서 헤드폰 쓰고 영상을 보고, 본부가 있어가지고 거기서 비디오를 돌려 보는가 봅니다. 알려줘 가지고 그래서 심판이 나중에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그 챌린지 신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본래의 그 심판이 판정을 했던, 세이프냐, 아웃이냐 하는 그 판단을,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명확하고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아무리 역사를 뒤집어 봐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마지막 날에 다 불타버리고, 그걸로 주께서 끝내 버리고 오직 주님만 남고, 주님의 말씀만 남는다는 말을 뒤집을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여러분, 증거 있으면 이야기해보세요. 15절 말씀을 잠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큰 무리로 인하여” 지금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숫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쳐들어왔는데, 그들을 마주보고 서있는 자들은 아무런 무기가 없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성가대 조직해서 지금 노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역대하 20장 속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변변한 무기가 있겠어요? 당연히 그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싸움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인데, 여호와의 전쟁의 본질은 거룩 하냐, 거룩하지 않냐, 하는 거예요. 거룩한 자는 거룩하지 않은 자를 이기게 되어 있는 거예요. 너희가 이것을 믿으면, 너희가 거룩한 자에 속해 있으면, 아무리 거룩하지 않은 자가, 원수들이 무기를 강력하게 하고, 뭐 사드배치하고, 핵미사일을 쏘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성경에, “두려워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이 많이 반복되잖아요. 그 말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옵니까? ‘아이, 그래. 두려워할 필요 없지. 뭘 놀래. 주님이 계시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얼마 동안. 3초. 정확히는 0.3초. 돌아서면 또....,제가 여기 오면서 설교 준비를 한 거예요. 처음에 설교 준비를 이렇게 했습니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반도 안 남아 있어요. 다 뒤집고 엎어버렸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모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님의 전쟁은, 그 두렵거나 놀라운 그러한 명확한 상황에서도 그렇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말을 우리가 읽고 볼 때마다, ‘아, 그렇지. 두려워하지 말고 또 놀라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도록 써진 말이 아니에요. 주님은 그러한 말을 던지고 내뱉었을 때는, 거기에 합당하고 명확하고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무리가 몰려와가지고 우리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놀랄 수밖에 없지만, “이 전쟁은 내가 하는 거야.” 라고 근거를 딱 제시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놀랄 이유도 없는 거죠. 주님이 다 하신다는데? 결국 뭘 말하는 거예요?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이잖아요. 내가 거룩한 하나님께 속해 있느냐, 아니냐는 그 가름이잖아요. 내가 뭘 행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이 전쟁을 벌입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전쟁의 양상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요. 이스라엘 안에서 지지고 볶는 전쟁이 일어나요.

나중에 신약과 신약 이후의 모든 시대에는 이 전쟁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전쟁이 몸의 전쟁이 돼버리고 내부전쟁이 돼버려요. 그것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바울의 탄식이잖아요. 그 유명한 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말을 가지고 바울이 믿음이 있었을 때다. 없었을 때다. 바울이 뭘 잘 몰랐을 때 한 이야기다. 그리고 뭐 성숙할 때 한 이야기다. 미숙할 때 한 이야기다. 하여튼 이것도 다, 욕이 들어가는 자리인데, 그 소리입니다. 모르니까 그냥 그런 소리만. 그냥 이것만 들여다보니까, 앞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바울이 그렇게 탄식한 것은, 그 안에 우리는 그러한 자리에 항상,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놀라지 말라고 했지만 놀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누가 이기게 하는 거냐? 너는 아니야. 내가 해! 라는 거예요. 시편 43편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져서 싸우게 될 때, 니가 아는 그 힘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힘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도 적용을 시켜가지고 예수님도 완전히 당해버렸어요.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내가 아는 하나님은 힘이 많고 능력이 있으신 그 하나님이신데, 그 힘으로 나를 충분히 붙들고 나를 충분히 지켜 줄 수 있고 두렵고 놀라운 상황에서 건져 줄 수 있는 그 하나님이신데,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거예요. 완전히 당해버린 거죠. 그렇게 믿었는데. 그 믿는 것은 니 생각이고, 니 자유고. 그 힘이 그 힘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힘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예수를 믿거나, 믿을 때,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항상 뭘 구합니까? 힘을 구하잖아요. “주님. 이길 힘을 주옵소서.” 그 힘없어도 이깁니다. 주님의 전쟁이니까. 대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일을 합니까? 전쟁이 예상되면 준비를 하잖아요. 유비무환정신으로 준비를 하고 대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말씀을 들었어요. “아이구, 그 여호와의 전쟁은 주께서 하시는 것이라며? 뭘 준비해?” 라고 어떤 사람이 그 말씀의 티를 낸 거예요. 그 말씀을 듣고 또 어떤 상대방이 받습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럼 아무것도 안 해? 그럼 우린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래.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가만있어. 그냥 살아!” 라고 하니까, 화가 나가지고 “그게 말이 돼? 뭐라도 해야지?” 이런 식으로 치고 박고 한 거예요.

복음이 꼭 이런 식으로, 복음이 던져지면 꼭 이런 식의 모습들이 계속 나타납니다. 완전히 도돌이표에요. 복음을 전했어요. 십자가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뭐 십자가마을 수련회 같은 것을 하면 또 밤새도록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럼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뭐 기도 안 해도 되겠네? 십일조 안 해도 되겠네?” 뭐 자기가 안 해도 되는 것,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죠. 그 다음부터는 뭔가 찜찜해가지고, “정말 안 해도 돼? 그래도 뭔가 해야지?” 뭐 이렇게 해요.

그리고 다 듣고 “아멘”하고. 분위기 좋게 가다가 맨 끝에 또 “목사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뭡니까?” “우린 어떻게 살아야 돼요?” 마지막 질문을 그걸로 굳히는 거예요. 그렇게 다 들어놓고. 이것이 계속 도돌이표처럼 계속 반복됩니다. 도돌이표가 무한도돌이표에요. 계속 반복, 반복, 반복됩니다. “전쟁이 일어난데. 준비해야지.” “아, 주님이 준비했는데 뭘 준비해?” “가만히 있어?” “그래. 가만히 있어. 가만히 살아.” 그럼 어떻게 돼야 하겠습니까? 이젠 그러려니 하죠.

이 기가 막힌 전쟁의 실상! 근본 원인이 뭐냐 하면, 우리 전쟁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누구의 전쟁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이 거기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창세기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싸움구경하는 거죠. 그 대표적인 유명한 구절이, 출애굽기 14장 13절 이후에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다 아시겠지만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주님이 다 하신 다잖아요? 그죠? 그럼 이제 우리는 구경하는 거예요. 구경.

그런데 구경한다고 하는 것이 참 재미있다고 해야 되나? 그 전쟁의 양상이 이렇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에요. 고래가 싸우는 것입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면, 싸움은 고래가 하는데, 피해는 새우가 입는 거예요. 이걸 좀 유식한 말로 하면 “부수적 피해”라고 합니다. 그런 말이 있어요. 그런 말을 제목으로 한 책도 있어요. “부수적 피해.”

전쟁이 주 목적이잖아요. 싸우는 게. 전쟁이 주 목적인데, 거기에 부차적으로, 부수적으로 어떤 피해가 생겼다는 거예요. 한국전쟁 당시에 총 사망자를 가장 크게 잡으면, 사백오십만 정도 됩니다. 되는데, 전쟁에 직접 총, 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 당사자, 군인들의 사망자가 약 사십사만 명이래요. 그럼 나머지? 90퍼센트 이상은 민간인이 죽은 거예요. 그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식으로, 더 많이 죽은 민간인의 죽음을, 전쟁 당사자 입장에서는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다라고 이렇게 발표를 합니다. 미국 CNN뉴스 같은 것을 보면은, 전쟁 상황 발표가 당당해요. “아, 여기 우리 군인이 몇 명 죽었고, 부수적 피해로 뭐 얼마..” 이걸 영어로 멋지게 해야 되는데..뭐 그런 말이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운동회 같은 것을 하잖아요? 저희도 큰 아파트 단지인데, 옛날 같지 않고 초등하고 운동장이 꽤 작습니다. 그리고 인조 잔디 같은 것을 깔아놓고 그랬어요. 그래도 그 작은 운동장에서 운동회 같은 것을 해요. 여러분,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이어달리기잖아요? 달리기 시합이잖아요? 달리기 하는 여러 팀이 딱 출발을 했어요. 열심히 달립니다. 달리다가 어떤 한 아이가 넘어졌어요. 엎어졌으니까 무르팍이 깨져서 피가 흐르고 있어요. 일단 애들은 피를 보면 놀래잖아요? 그 피를 보고 주저앉아서 달려야할지 말지, 그런 것은 잊어버리고 엉엉 울고 있는 거예요.

자, 또 다른 한 아이도 넘어졌습니다. 무르팍이 깨졌습니다. 피가 흐릅니다. 그런데  피를 스윽 보더니, 그냥 툭툭 털고, 씨익 한 번 웃고, 여기 씨익 한 번 웃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씨익 한 번 웃고 그냥 골인지점으로 달려 나간 거예요. 자, 지금 달리기 시합이라는 주된 목적을 가진 어떤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근데 달리다가 넘어진 것은 부수적 피해에요. 근데 씨익 웃고 골인지점으로 달려간 아이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러한 피해가, 그러한 상처가, 그러한 아픔이, 그러한 죽음까지 내게 있더라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나는 골인지점으로 달려갈 거기, 골인지점이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야 된다는 거예요. 뭐가 중요한지를 아는 거죠. 그죠? 깨지든 말든,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냥 억지로 참아야지. 이 힘든 일 참고 이를 악물고 참아야지.’ 해서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니고, 인내는 그렇게 참아지는 거예요. 웃으면서. 왜냐하면 주님께서 발생시킨 일. 주님께서 전쟁을 벌였는데, 피해는 내가 입는 식으로 닥쳤을 때, 이 피해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아주 명백한 운명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한 일들이 보상을 못 받고, 대우를 못 받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많아요. 그럴 때마다, 그냥 주님 생각하면서 그냥 씨익 웃고 넘어가버린다면 그게 인내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깨지고, 엎어지고, 자빠지게 한 것도 주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주께서 하신 일이라면, 내가 당한 피해도, 내가 당한 실족한 일도 주께서 하신 일 아닙니까?

오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을 들여다보는 그 잣대를, 늘였다, 줄였다,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돼요.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저울은 항상 고치거나 옮기면 안 되는 거죠. 우리가 자꾸 십자가 복음을 안다, 뭐 예수를 안다, 뭐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 넘어진 지점에서 웃을 수 없으면, 그것은 그 안다는 것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에요. 사도들은 이런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 시련을 당하거든 어떻게 하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성경은 정답이 다 있다니까요. 여러분. 우리가 안 찾아보고 우리가 관심을 안두어서 그렇지. 여러 가지 시험이 오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그죠. 억울한 일 당해도 마찬가지잖아요. 무르팍 깨진 것이 대수에요? 예수님이 왔다 갔다는데? 그런 일을 겪어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은, 그 근거가 뭡니까? 그 밑에, 그 배경에, 백그라운드에 주님이 계신 거예요. 주님이 다 아시고 관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부수적 피해에, 무르팍 깨진 것에, 그냥 온 신경이 다 쓰여 지는 거죠. 아무리 눈을 부라리고 안다고 우겨도 그거 아무 소용없어요. 그냥 정보, 정보차원에서 정보하나 습득한 거예요. 정보라는 것이 뭡니까? 그때그때 상황에 필요한 어떤 것이잖아요. 그래서 그 상황이 바뀌면 내가 아는 정보는 소용이 없습니다. “11시 57분 실시간 교통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12시 57분에 그 교통정보가 소용이 있어요? 없잖아요.

또 하나, 주식시장의 고급정보. 오늘은 필요한 이야기이겠지만, 내일은 필요 없잖아요? 만약 내일 주식시장의 그래프가 어떻게 움직인다고 안다면, 오늘 달러 빚을 내서라도 다 사놓겠죠? 그죠? 내일 확실하니까. 그러나 주식정보는 항상, 더군다나 나에게 오는 주식 정보는 항상 고급정보는 아니죠. 그죠. 시간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다 날아갑니다. 날씨 정보 또한 마찬가지죠.  

전쟁을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무대포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되잖아요. 오전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은, 마귀의 전략은 뭡니까? 뱀의 후손으로서 마귀의 전략은 어떤 전략이에요? 분할통치를 한다고 했죠? 분할통치. 한 인간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면 인간인 거예요. 근데, 마귀에 의해서 어떻게 됐습니까? 한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진 거예요.

인종이 있어요. 흑인이 있고, 백인이 있고, 황인이 있고, 홍인종도 있어요. 아까 미국이야기도 잠시 드렸지만, 그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 초창기에 인디언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어요? 흑인들이 얼마나 많이 백인에 의해서 많이 죽임을 당했습니까? 이게 분할통치하는 거예요. 종교 마찬가지죠. 경제, 문화, 이런 차이로 갈등을 조장하고, 경쟁으로 내몰아넣고, 서로 치고 박고 싸우도록 하는 거죠. 분열을 획책하는 거죠. 주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거죠. 십자가를 멀리하도록 하는 거죠. 마귀의 전술입니다. 전략입니다.

분할통치를 깰 수 있는 그 유일한 방법은 바로 통일입니다.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거예요. 통일 전선을. 말이 좀 그런데..., 이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다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입니다. 28절을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거예요. 하나. 그리고 또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9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자의 후손 되시는 주님께서 마귀를 대적하는 그 전쟁에서 사용하시는 그 전략은 통일전선입니다. 남과 여를 우리는 구별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라는 거예요. 자유자나 노예나 하나라는 거예요. 인종, 문화, 정치, 종교 갈등, 모든 갈등이 그냥 하나라는 거예요. 어디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그러니 그 안에서 뭔가 나누는 것은, 마귀의 전략에 넘어가는 거죠. 그래서 주 안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거기에는 있을 수가 없는 거죠. 나라는 것을 따로 상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모셔놓고 그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겁니다. 그게 통일체를 이루고. 근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안다고 해도 그냥 정보차원에서 듣고 흘려버린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요. 그저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구약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면 저는 기억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기억하라. 옛적 일을 기억하라. 여호와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라. 네 조상들에게 한 일을 기억하라.

신명기에 보면 대표적으로 그런 내용들이 아주 압축적으로 해서 다 기록이 되어 있죠. 너무 그 오고 오는 후손들이 다 잊어버리니까 그걸 기억하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못 기억하고 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을 못 기억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쫓겨난 것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돌아가야 된다는 것도 기억을 못하는 거예요. 생각이 안 나는 거죠. 이른 봄에 매화꽃이 피면 우리는 그걸 보고 감탄을 합니다. 감탄을 하다가도 진달래꽃이나 철쭉꽃이 활짝 피게 되면 매화꽃은 어디 갔습니까? 이 기억 속에서 다 사라져버리죠.

우리는 주님의 말씀도 꼭 그런 식으로 처리해버려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그래서 목사가 맨날 똑같은 소리해도 되는 모양이에요. 그저 내 눈을 호강시키고, 우리 살다가 또 어려운 일 당하면, 그냥 말씀이고 뭐고 팽개치고 다 그냥 돌아서버립니다. 가끔 버티는 사람이 있어요. 가끔 버티더라도 그 버티는 것이 자기 투자한 돈이나 시간 때문이지, 결코 믿음 때문에 버티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초창기에 이 기독교 종교는 아주 사악한 종교로 이름이 났어요. 뭐 피를 마시고, 뭐 몸을 떡으로 삼아먹고, 뭐 이런 이야기들이 즐비하게 나오잖아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즐비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발라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소스처럼 뿌려진 그 피의 복음이 입에 맞지 않으니까 그냥 뱉어버리는 거예요. 뱉어버리고 돌아서버리는 겁니다. ‘에이, 맛없어. 다른 집에 가서 먹어야지.’ 이러고 돌아서버립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잘 가!”하죠. “어디 예복도 없이 와가지고 이 고급음식을 타박을 하고 있어?” 이런 식으로 하면서 가는 것 붙잡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을 보고 제자들도 “참 이 말씀이 어렵도다” 했어요.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이 말씀을 듣고 소화시켜낼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결과와 정답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로 이상하고, 정말 이렇게 신기한 여호와의 전쟁은, 그 시작하신 분이 끝도 내십니다. 우린 아무생각 없이. 생각이 많으면 뭐가 상한다고요? 비위가 상합니다. 아무생각 없이 사세요.

성경 한 구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시편 46편 9절과 10절인데, 9절,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거예요.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쉬게 하신다는 거예요. 쉬게 하실 때에 쉬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늘과 땅에서 난리가 났어요. 모든 사단이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임을 알고, 그것이 복인 줄 알고 그냥 사시면 됩니다. 쉬라고 하셨으니까 우리는 쉬면되겠죠? 그죠? 여러분, 잘 쉬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고 주님께서 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우리가 나서서 어떻게 할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맡겨진 채로, 주께서 끌고 가시고 있으니, 주님 하시는 일을 보면서 쉬라 하신대로 잘 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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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9.20 -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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